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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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항과 홋카이도의 청어: ‘북해’의 물고기, 역사를 바꾸다
김문기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2018-11-27 17:28:56

낯선 곳에서도, 낯익은 것은 있다. 동래출신의 수어청 무관 이지항(李之恒)이 강원도로 가기 위해 부산포에서 출항했던 것은 숙종 22(1696) 413일이었다. 출발 때부터 순탄치 못했던 바람은 보름째 되던 날 더욱 거세게 몰아붙여 일행을 망망대해로 떠돌게 했다. 허허한 대해를 정처 없이 표류하다, 열사흘 만인 512일에 어느 외딴 섬으로 밀려갔다. 그 섬은 태산 같은 산은 눈으로 덮여 있었고, 산기슭 밑에는 임시로 지은 20여 채의 초가가 있었다. 허기진 몸을 이끌고 안을 들여다보니, 그곳에는 무수한 물고기들이 매달려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눈에 익은 것도 있었다. 거기에 매달려 있는 물고기, 바로 청어와 대구였다.

 

이지항이 표착했던 곳은 아이누 족이 살고 있던 에조치[蝦夷地], 즉 오늘날의 홋카이도였다. 이지항 일행에게 안도의 숨을 쉬게 했던 눈 덮인 태산 같은 산은 해발 1721미터의 리시리산[利尻山]’으로 보인다. 이지항 일행은 홋카이도의 서쪽 최북단에 표착했던 것이다. 그곳은 북쪽의 차가운 바다, 바로 북해(北海)’의 땅이었다.

 

 

 

그림 1. 홋카이도 서쪽 최북단에 위치한 리시리섬(利尻島)의 리시리산 모습(왼쪽)과 이지항이 경유했던 홋카이도의 주요 지역 [蝦夷新図](오른쪽)


조선에도 북해가 있었다. 함경도의 바다가 곧 북해였다. 차가운 바닷물이 흐르는 북해에는 따뜻한 남쪽바다에서 볼 수 없는 물고기들이 있었다. 조선후기의 문인 성해응(成海應, 1760-1839)북해에서만 나는 물고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를 둘러싼 바다는 물고기가 자라는 곳이니, 천하가 그것을 공유한다. 다만 우리 북해에서만 나는 물고기가 있으니, 그 어종은 <이아(爾雅)>, <비아(埤雅)>, <광아(廣雅)> 등의 여러 책에서는 일체 보이지 않는다. 단지 우리나라만이 그 이익을 독점하는 것은 네 종이다. 명태어(明太魚), 대구어(大口魚), 청어(靑魚), 목어(牧魚)가 그것이니, 모두 우리이름이다.

 

이 중에 은어(銀魚)로도 불렸던 목어는 도루묵을 말한다. 성해응은 우리바다에서만 나는 물고기로 명태, 대구, 청어, 도루묵이 있다고 했다. 중국에는 이들 물고기가 나지 않아 한자이름이 없고, 우리나라만이 그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성해응의 이 말은 틀린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다. 이들 물고기 중에 청어와 대구는 어느 때부터인가 중국에도 나기 시작했고, 성해응이 살았을 때는 이미 중요한 물고기로 되어 있었다. 시선을 일본으로 돌리면 더욱 흥미롭다. 일본에서도 청어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이들 물고기가 일본경제에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느 때는 언제일까? 이전에는 나지 않던 청어가 중국바다에 홀연히 출현하게 되었던 일은 유성룡의 <징비록>에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10여 년 전에 벌어진 이때의 이변은 참혹한 전쟁의 조짐으로 여겨졌다. 고상안은 남해까지만 나던 대구가 서해에서 나기 시작했던 것도 이때라고 했다. 바로 이때 즈음에 일본에서는 청어(herring)’를 가리키는 한자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일본에서 청어는 카도혹은 니신이라고 하는데, 한자로는 ()’()’자를 쓴다. 더 앞선 ()’자가 처음 출현했던 것은 1548년으로, 16세기 중반이었다.

 

라는 글자에서 볼 수 있듯이, 홋카이도의 아이누 족에게 청어는 단지 물고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추운 날씨로 벼농사가 되지 않던 홋카이도에서 청어는 쌀을 대신하는 주식이었고, 또한 교역으로 쌀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물품이었다. 이지항이 이곳사람들은 물고기를 주식으로 한다고 기록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밥을 먹을 수 없어 잇몸이 모두 상할 정도였던 이지항 일행이 그나마 목숨을 이을 수 있었던 것도 낯익은음식, 바로 청어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청어어업이 발전했던 배경에는 홋카이도에 대한 본토인의 진출과 관련이 있다. 백여 년에 걸친 홋카이도의 동란을 평정하고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한 가키자키[礪崎]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아이누 족과의 교역독점권을 획득했다. 마츠마에[松前]로 성을 바꾼 이 가문은 홋카이도 최남단에 위치한 마츠마에[松前]’를 근거지로 하여 홋카이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이지항에게 아이누 사람들이 마츠마이라고 가리켰던 곳이 바로 마츠마에였다.

 

홋카이도에는 쌀이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츠마에 번은 다른 다이묘처럼 연공미(年貢米)를 징수할 수 없었다. 결국 아이누와의 교역을 통해 재정을 확보해야 했다. 이렇게 하여 주목받은 것이 연어, 해삼, 전복, 다시마와 같은 해산물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풍부하게 나는 것이 바로 청어였다. 에도시대 홋카이도의 청어어업은 너무나 눈부셨다. 이지항의 표류로부터 90여 년이 지난 1788년 막부순견사(幕府巡見使)를 수행하여 에조치를 시찰했던 후루카와 고쇼켄(古川古松軒)은 청어어업이 가장 번성했던 에사시[江差]를 지나면서 그때의 목격담을 다음처럼 남겼다.

 

에조치와 마츠마에의 사람들은 청어로써 한 해 동안 필요한 모든 일의 비용으로 삼는다. 때문에 청어가 올 때가 되면 사무라이든 상인이든 구분 없이, 의사나 신관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살던 집은 빈 집으로 버려두고 각자 해변에 임시막사를 세워서 앞 다투어 청어잡이를 한다. 남자들은 바닷가에서 작업하고, 부인과 아이들은 청어를 갈라 청어알젓을 만드는 일을 한다. 그 중에서 건장한 사내는 열에서 열다섯이 모여서 큰 배를 타고 에조치로 청어를 잡으러 간다. 이 때문에 마츠마에에서는 일본의 풍흉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청어가 수많이 오는 해는 풍년이라고 하고, 청어가 조금 오는 해는 흉년이라고 한다.

 

후루카와가 묘사한 청어어업의 번성함은 에사시병풍도[江差屛風圖]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안가의 임시막사와 바다를 가득 메운 배들은 모두 청어잡이를 위한 것이었다. 이지항은 마츠마에에 도착하기 나흘 전인 723, ‘예사치[曳沙峙]’에 당도했다고 했다. 예사치가 바로 에사시[江差]’이다.

 

 

   

그림 2. 에사시의 청어어업 모습이 담긴 에사시병풍도


 

청어가 얼마나 많이 잡히던지, 사람들은 물려서 먹지 못하여 고양이 먹이로 줄 지경이었다. 이렇게 되자 청어의 풍부함에 눈독을 들인 집단이 나타났다. 오우미(近江)상인들은 청어를 으깨어 비료로 만들어서 일본 전역으로 유통시켰다. ‘금비(金肥)’로도 불렸던 청어비료(鰊肥)는 정어리비료(鰮肥)와 더불어, 에도시대의 농업혁명을 이끌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홋카이도의 청어비료를 전국적으로 유통시켰던 기타마에부네(北前船)’는 마츠마에에서 오사카로 연결되는 해양교역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에도시대 상품경제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지항은 마츠마에의 인물과 물산은 그 풍성함이 우리나라 큰 도시보다 백배나 더하다고 했다. 이러한 풍성함은 해산물교역, 특히 청어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메이지시대에도 홋카이도의 청어어업은 더욱 발전하여, 이른바 백만석시대(百萬石時代)’를 이끌었다. 그렇지만 청어어업은 1897년을 정점으로 하여, 점차로 쇠퇴했다. 남부에서 청어가 잡히지 않게 되자, 어장은 계속 북부로 이동했다. 마침내 1955년에는 사실상 청어가 사라져버렸다. 이런 현상은 중국과 우리바다에서도 나타났다. 19세기 후반 서해와 남해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청어는 20세기 전반에는 기껏 동해에서만 났다. 이런 현상은 소빙기(Little Ice Age)가 끝나고 온난화(Warming)가 본격화되는 것과도 일치한다.

 

21세기 오늘날, 성해응의 말했던 북해의 물고기들은 훨씬 먼 베링해로부터 공급받는다. 청어, 명태, 도루묵 같은 한류성어종은 동해에서도 보기 어려운 물고기가 되었다. 일제강점기까지 함경도의 청진에는 북해의 물고기들이 많이 났다고 한다. 이제 거짓말처럼 냉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남북협력시대를 맞이하여, ‘철과 정어리의 도시였던 청진에는 여전히 북해의 물고기들이 안녕한지 묻고 싶다. 돌이켜보면, 부산사람 이지항은 성큼 다가온 환동해시대를 처음으로 목격했던 선구자였으리라

 

 

  

김문기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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