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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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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항과 두모진수세사건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

2020-10-26 11:08:02

   조선이 강제로 근대 개항되던 1876년을 전후하여 전 세계는 큰 가뭄을 겪고 있었다. 그해 6월 고종은 직접 사직단에서 특별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얼마나 가뭄이 심했으면 병자년 까마귀 빈 뒷간 들여다보듯 한다며 그때의 굶주림을 속담 속에 담아 전해주고 있을까? 부산항은 이러한 흉흉한 시절에 본의 아닌 개항을 했다. 그것도 무관세(無關稅) 개항이었으니 일본 무역상들에게 가뭄의 단비였다. 더구나 일본 상인에게는 더더욱 좋은 기회였다.

개항을 전후해 중국과 일본 상인들이 조선에 많이 들여온 상품은 영국산 기계섬유제품인 옥양목(玉洋木)이었다. 옥양목은 옥처럼 하얀 서양 옷감이라는 뜻으로 당시 사대부가 애용하던 박래품 중 하나였다. 영국은 아편전쟁 승리 후 중국을 개항시켜 자국 상품을 아시아에 수출하는 교두보로 이용했다. 상하이는 면제품을 재수출하는 대표적인 중계무역항이었다.

 

  

1876년 개항 직전 일본 사진작가 가와타 키이치가 촬영한 부산항 최초의 사진

(1934신부산대관)

 

 

   1860~70년대 조선으로 면제품이 들어온 통로는 두 곳이었다. 뭍으로는 의주부(義州府, 현 신의주)이고. 바다로는 동래부(東萊府, 현 부산)였다. 의주부에서는 앞서 1814(순조 14)부터 상세(商稅:무역세)를 거두어들여서 나라 재정수입에 사용하여 왔다. 특히 1830년대 후반부터 서양 면직물이 활발하게 유입되었지만, 19세기 중반엔 탈세 행위가 만연하여 중앙 정부에서는 현지에 감세관(監稅官)을 파견하여 면직물 통관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부산항이 개항되자 증기선편으로 무관세 면직물이 대량으로 반입되어 조선의 재정 수입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의주를 통한 육로무역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의주부와의 수세 형평성 문제가 대두되면서 동래부의 수세 필요성이 나타났다.

한편, 일본도 주변국의 환경 변화에 민첩하게 대처했다. 1877년 나가사키와 부산 간 정기 직항로를 개설하고 상해에서 건너온 옥양목을 조선에 독점 중계 무역하면서 앞서 중국 상인들이 누려왔던 무역 기득권을 서서히 빼앗아갔다. 1878년에는 일본 국립 제일은행 부산지점까지 개설하면서 드디어 해운과 금융을 조선에 침투시켜 무관세무역을 위한 체제를 공고히 했다. 이에 힘입어 일본 상인들은 옥양목 중계무역으로 폭리를 취하고, 그 이익금으로 조선의 쌀과 콩을 대량 구매하여 자국으로 반출했다. 1878년 조선에 수입된 영국제 면제품은 전 수입품의 76%에 달했고, 수출품은 쌀·대두 등 곡물이 약 60%를 차지했다. 이러한 상황이 그대로 드러난 곳이 당시 조선의 유일한 개항장 부산항이었다. 선착장에는 일본 상인의 중계무역 상품인 면제품과 일본으로 싣고 나갈 쌀가마 등이 가득 쌓였다. 이대로 두면 조선이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여기에 외국산 면제품 유입으로 삼베·모시를 생산하는 가내공업 기반마저 흔들리며 가뭄 속 민심은 더욱 나빠졌다.

 

   1878년 개항장 주변을 감찰한 경상좌도 암행어사 이만직(李萬稙)은 이 정황에 관해 별단(別單:본 보고서에 첨부된 문서)을 올렸다. 의정부(議政府)에서 검토한 후, 고종의 윤허를 받아 동래부사에게 하달된 내용은 오늘날의 관세율표라 할 수 있는 세목책자(稅目冊子)와 수입품에 대한 수세 조치였다.

일반적으로 수입품에 대한 관세 납세의무자는 수입자 또는 화주가 된다. 그러나 조선은 강화도조약에서 수입품에 대한 무관세를 인정했기 때문에 일본 상인에게 관세를 물릴 수 없었다. 부득이 개항 전에 초량왜관을 통한 중계수입품의 수세방식과 비슷하게 1878928, 두모진(현 동구 수정동)의 판찰소(辨察所:화물수세 업무 등을 보는 사무소)에서 동래상인이 일본 무역상에게 구매한 수입상품에 대해 15~30%를 과세했다. 그러자 일본 상인들은 매매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반발이 심했고, 뒤에는 200여 명이 동래부에까지 난입하여 소란을 피웠다. 이어 일본 정부는 1118일 하나(花房) 대리공사 등을 부산에 파견하여 수세를 정지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으나, 당시 동래부사 윤치화는 과세는 우리 국민에게 부과하는 것으로 귀 국민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다고 하면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조선은 내국인에 대한 과세는 정당한 권리로서 일본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라고 강조하였지만, 일본은 1876824일에 맺은 조일수호조규의 부칙을 들먹이며 이에 대한 위반으로 철폐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이번에는 최신예 군함까지 부산항에 보내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사건을 비화하기 바빴다. 결국 3개월 후에 조선 조정은 수세를 중지하고 만다. 이것이 두모진수세사건이다. 일본은 이 사건을 조선사건’, 우리 조정은 부산사건이라 불렀다

 

부산항 무력시위에 참가한 비예환(比叡丸, 3,178, 최대속력 13.7노트).

  -이 군함은 1875년 일본 해군부 창설과 함께 최초로 영국 밀포드 헤이븐 조선소에 수주하여 19785월에 인도된 신예 군함이다-


 

  이처럼 개항 때의 무관세 폐단에 대항해 수세로 대처했지만, 일본의 무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오히려 일본은 다음 해에 ‘피해대상 요구7건(被害代償要求七件)’을 앞세워 원산, 인천의 개항을 압박해 왔으며 그 파급은 컸다.

일본이 요구한 7건은
➀일본 화폐의 통용과 조선 화폐 주조
➁조선인의 일본 선박을 고선(雇船)하여 화물의 국내 운송에 이용
➂조선인의 일본 왕래 허가
➃개시일에 일본인의 행상도 용인
➄본초(本草), 광산, 지질 등의 학술연구를 위한 일본인의 조선 내지 통행
➅대구 개시에 일본인의 상(商)행위 용인
➆해안에 등대·부표 설치 등이었다.

 

  근대국가의 기본 주권으로 형사권과 관세자주권을 뺄 수 없다. 이중 관세권은 국내시장을 보호하고 국가재정수입을 확보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떻게 보면 ‘두모진수세사건’은 개항 때의 무관세 폐단에 대한 우리의 관세자
주권 회복을 위한 몸부림이 아닌가 한다. 오늘날 세관직원의 정복 왼쪽 가슴에 달린 흉장에는 ‘1878’이란 숫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것은 지난날 역사적 사건을 통해 관세자주권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는데 있을 것이다.​

 

 

부산광역시 동구 부산진세무서 옆 쌈지공원에 설치한 두모진(해관) 수세사건 기념비

  

 

 

 

 

 

부산세관 박물관장

이  용  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