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INESS 배, 환골탈태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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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골탈태(換骨奪胎)는 뼈와 태를 모두 바꾼다는 말이다.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근본마저 송두리째 바꿔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이룬다는 의미다. 요새 이 말이 가장 적확하게 들어맞는 게 배를 만드는 곳이다. 선박의 변화가 그만큼 거세기 때문이다. 기존의 배로는 더 이상 환경을 강조하는 시대적 흐름에 따를 수 없어서다. 특히 선박이 이산화탄소는 물론 황산화물과 미세먼지 등을 내뿜는 주범으로 꼽히면서 더욱 수세에 몰리고 있다. 이게 다가 아니다.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적용한 자율주행차량과 전기차 등이 속속 등장하면서 바다에도 스마트 바람이 불어왔다. 전기 추진 선박이 등장하면서 배는 더 이상 대기오염가스를 배출하지 않게 됐다. 자율운항선박의 출현으로 그동안 배를 움직이던 선원들의 역할도 애매해졌다. 선박 연료유를 사용하지 않는 선박, 선원이 없는 배가 나오면서 지금까지의 배는 미래의 배가 아닌 세상이 됐다. 배가 환골탈태하는 이유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메이플라워 호 400년 주년 선박
1620년 9월 16일, 영국 남부 플리머스 항에서 이민자 102명을 태우고 메이플라워 호가 미국으로 떠났다. 이 선박은 66일 동안 대서양을 항해한 끝에 12월 21일 오늘날 미국의 매사추세츠 주 연안에 ‘필그림 파더스’ 35명을 내려놓았다. 영국 성공회와의 갈등과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난 청교도들이었다.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2021년 5월, ‘메이플라워 호 400년’을 기념하는 사업의 하나로 영국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선박 하나가 만들어졌다. 길이 10미터 무게 10톤의 이 배에는 꼭 있어야 할 선장도 없었고, 선원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돈벌이에 필요한 화물이나 여객 이용 시설도 갖추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인공지능(AI)으로 운항하는 이른바 AI 선장과 태양광을 이용해 선박에서 쓰는 전기를 생산하는 솔라 패널이 달려 있을 뿐이었다. 항해를 지원하는 최첨단 카메라 6대와 레이더, 그리고 IBM의 선박 운항 알고리즘과 연계된 자동항법 시스템이 설치된 것이 전부였다. 메이플라워 호처럼 대서양을 횡단하게 될 세계 최초의 무인자율운항선박(MAS)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 메이플라워호 400주년 선박 및 사업 홈페이지 >
ⓒ 메이플라워호 400년 사업 홈페이지
the Mayflower 400은 영국의 해양연구기관이 프로마레(Promare)가 IBM과 협력사업으로 100만 달러를 투입해 건조했다. 대서양을 건너면서 해양 포유류 관찰과 해양 쓰레기 분석, 해양오염 등을 조사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설계됐다. 한 가지 아쉬운 대목은 최첨단 기술을 탑재한 이 선박도 코로나19 앞에서는 무력했다는 점이다. 당초 2020년에 출항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와 기상 상태 등으로 1년 연기되어 2021년 5월 15일 플리머스를 떠났다. 그리고 항해 1주일 후 ‘선박 운항에 따른 일반적인 결함이 발견되어’ 다시 모항으로 돌아왔다.
현대 아비커스, 태평양을 건넌다.
이번에는 우리나라의 현대중공업 아비커스(아비커스는 바이킹 원조 선박 명칭이라고 함)가 만든 자율운항선박이 조만간 태평양을 건너게 된다. 정기선 HD현대 사장은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인 ‘CES 2022’에서 해양 모빌리티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HD 현대의 사내 벤처회사인 아비커스가 최근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올해 하반기에 자율운항 기술을 활용한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이 대양 횡단에 도전한다. 대형 선박이 자율운항을 시도하는 세계 첫 번째 사례다. 이 배는 길이 300m, 폭 46.4m, 높이 26.5m의 ‘프리즘 커리지(Prism Courage)’호로 미국을 출발해 태평양을 넘어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 현대중공업 사내 벤처 아비커스 홈페이지 >
ⓒ아비커스 홈페이지
아비커스가 개발한 선박 자율운항 기술은 크게 하이나스(HiNAS·운항)와 하이바스(HiBAS·정박)다. 전자는 선박의 눈과 뇌에 해당하는 것으로 카메라와 인공지능(AI) 센서 등으로 선박 주위의 장애물을 인식하고, 위험도를 분석한 뒤 이를 증강현실로 만들어 선장 등에게 알려준다. 하이바스는 선박의 이안과 접안을 도와주고, 충돌사고 등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아비커스는 이 같은 기술을 진짜 바다에서 검증하는 시연회를 지난 16일 경북 포항에서 가졌다. 이날 행사에서는 특히 자율주행 자동차에 탑재되는 레이저 기반의 센서(LiDAR)와 특수 카메라 등 첨단 항해보조시스템을 선박에 적용했다. 배에 선원 없어도 바 다의 날씨와 조류, 어선 출현 등 다양한 돌발 상황에 스스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아비커스는 이번 시연회를 바탕으로 자율운항 관련 기술을 더욱 고도화하는 한편, 여객선과 화물선 등 모든 선박에 확대‧적용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 야라 자율운항선박 및 스비처 자율운항예인선 모델 >
ⓒ 야라 인터내셔널 및 스비처 홈페이지
자율주행 예선 등 선박 무한 변신
선박의 변신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글로벌 비료 회사인 야라 인터내셔널은 전기를 추진 동력으로 쓰는 무인 자율컨테이너 선박인 야라 비르켈란(YARA Birkeland) 호를 건조했다. 이 선박은 2020년 시험운항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등으로 연기되어 지난해 11월 노르웨이 남동쪽 해안인 오슬로 피오르에서 첫 운항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앞으로 2년 동안 준비기간을 거쳐 최대 120개(20피트 기준)의 컨테이너에 비료를 싣고 야라 공장이 있는 포르스그룬항에서 브레비크항까지 12km 해역을 운항한다는 계획이다. 예선업계도 이 같은 대열에 동참했다. 세계 최대 해운회사인머스크 라인(Maersk Line)의 자회사인 스비처(Svitzer)는 자율운항 예인선과 메탄올 연료전지 예인선 개발에 들어갔다. 이 회사는 세계 최초로 완전 원격 조종이 가능한 예인선(RECOTUG)을 자율운항 기술 개발업체인 노르웨이 콩스버그(Kongsberg) 등과 공동으로 개발하는 한편, 선박설계회사인 로버트 알란과 세계 첫 메탄올 연료전지 예인선을 개발하기로 했다. 이 같은 사례는 모두 시대의 흐름과 환경 트렌드를 읽는 선도기업이 살아남는다는 ‘패스트 무버’ 전략으로 보인다. 선박의 무한 변신은 이제 시작이다. 우리의 나침판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주)에코트라 오션 랩
연구개발본부장, 법학박사
해양 전문지 『디 오션』, 『오션 테크』, 『환동해 경제학』 등을 공동기획하고, 같이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