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INESS 제주 디자이너, 해녀복으로 새로운 미래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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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국내외에 이름을 알린 패션디자이너가 되었다.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성취와 성공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의 고민은 패션이 가진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문제들이었다. 바로 패션산업의 지속가능성에 관한 것이었다. 지구에서 매년 버려지는 옷은 대략 330억 벌이나 된다고 한다. 섬유 쓰레기가 쌓여서 제 무덤을 만들고 염색공장의 화학폐기물이 바다를 잠식하고 있는 시대. 옷 한 벌이 태어나기까지의 과정보다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 혜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년 패션디자이너, 해녀복을 만나다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의 옥빛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내 패션의 영감의 원천이었기에 여느 날처럼 나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동그란 주홍색 꽃들이 바다를 수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주 해녀들이 조업을 하고 있는, 어릴적부터 익숙하게 봐온 풍경이지만 그날은 좀 달랐다. 장시간의 조업을 마친 어벙한 검은 잠수복의 해녀들이 하나 둘씩 테왁 망사리를 들고 바다에서 걸어 나왔다. 그 모습은 마치 달에 상륙한 NASA의 우주대원 같은 비주얼이었다.해녀들의 작업복인 ‘해녀복’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왜 저런 어벙한 옷을 입고 일을 할까? 왜 고무 소재로 옷을 지었을까? 왜 검정색이어야 했을까? 모든 것이 궁금증 투성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해녀와 해녀복에 대해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해녀복’이라는 하나의 단어를 통해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바다를 돌보며 제주인을 길러내었던 모계중심의 해녀문화와 내 고향 제주를 좀 더 깊숙하게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일본산 고무로 만든 해녀복을 입는 우리 해녀들
해녀복을 연구하면서 나를 가장 당황스럽고 가슴아프게 했던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까만 해녀복이 일본의 야마모토라는 고무로 만든 것이며 이는 반세기 넘게 수입, 의존되면서 사용되어왔다는 것이다. 제주 해녀문화가 201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인류유산에 등재되면서 제주특별자치도는 매년 일본에서 야마모토 고무를 수입해 현역 해녀들을 위한 조업복으로 제작 및 공급하고 있었다. 제주 해녀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이제라도 제주 해녀의 해녀복을 국산 소재로 개편하고, 제주 해녀의 억척스럽고 노후화되고 있는 천편일률적인 이미지도 새롭게 정립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에서 해녀복연구소를 설립하다
제주도에 다시 정착한 나는 본격적으로 해녀복연구소를 설립하고 새로운 해녀복식을 기획하고 제작하기 시작했다. 야마모토고무의 낡고 헤지는 단점을 보완하고 선명한 컬러감과 강한 내구성을 가진 네오프렌 소재를 개발하여 해녀 잠수복, 방풍자켓, 레쉬가드 등의 유니폼을 개발하고, 그것을 대중들이 입을 수 있는 스테디 아이템의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제 아무리 서핑, 스쿠버 다이빙을 즐기는 사람이라도 제주도 해녀만큼 바다에서 장시간 활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는 제품의 개발 단계에 있지만 제주 해녀와 함께 연구하고 개발하는 잠수복은 해양레포츠를 즐기는 세계인에게 큰 사랑을 받을 거라 확신한다. 우리는 그 가설과 가능성을 동시에 검증해 나가고 있다.
제주의 자연에서 제주해녀의 색을 찾다
어느날 제주 구좌읍 해녀 회장님께서 대대로 내려져오는 물소중이를 내게 물려주셨다. 처음 본 물소중이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패션디자이너 입장에서도 결코 쉽지 않은 패턴이며 사용자를 위한 설계감에 놀랐다. 단순히 유방과 음문을 가리는 의복일 뿐만 아니라 풍족하지 않았던 섬유를 가장 절약해서 활용하고, 최소한의 바느질을 통해 제주 해녀들이 그들의 자녀에게 물려주며 입던 전통 해녀복이었다.
이처럼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제주의 전통 해녀복을 직접 만져보면서 시대에 맞게 복원하고 재창조하기위한 연구는 속도를 내고 있었다. 해녀의 물소중이 원형에 새롭게 컬러를 부여하기위해 끊임없이 실험을 하고 있었다. 제주의 바다빛을 담고 싶은 마음은 욕심이었을까? 쉽게 결론이 나질 않아 고민이 많았던 어느날 해녀 한분이 한번 먹어보라며 해산물 무침을 한 접시 내오셨다. 달팽이처럼 생겼는데 식감은 쫀득했다. 이름을 여쭤보니 굴멩이(군소)라고 하셨다. 호불호가 있는 음식이라고 하는데 내 입맛에는 너무나 찰떡이었다. 굴멩이를 맛있게 먹고있는 와중에 굴멩이 속살에서 선명한 청보라색 도장이 찍혀있었다. 해녀분에게 여쭤보니 굴멩이의 먹물이라고 하셨다. 드디어 답을 찾았다. 화학염료가 아닌 바로 천연염료를 통한 옷감으로 제주 해녀의 첫 잠수복인 물소중이를 제작하게 되었다. 제주 해녀들이 채취한 굴멩이 300마리의 천연먹물을 활용해 침염-매염-건조 3회를 반복해서 얻은 결실이었다.
국산 해녀복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나는 해녀분들과 함께 바다의 무한한 잠재력과 영감을 배워가고 있다. NASA의 우주복과 같은 명성을 지닌 제주도 해녀복이 개발되기를 꿈꾸며 또한 그것이 영원한 예술로 남고 세계인들의 사랑하는 패션이 되길 바라며 오늘도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다.
제주 출신의 디자이너로 제주의 바다와 하늘, 동식물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
자연과 어우러지고 생태계를 보호하는데 기여한다는 확고한 패션 철학을 가지고 있다.
2019년 제주도 구좌읍에 해녀복연구소를 설립, 제주도 해녀의 국산 유니폼 개발 프로젝트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