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등대, 천년의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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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도로 표지가 있는 것처럼, 바다에는 항로 표지가 있다. “도로 표지”란 도로 이용자가 도로 시설을 쉽게 이용하고, 원하는 목적지까지 쉽게 도착할 수 있도록 도로의 방향ㆍ노선ㆍ시설물 및 도로명의 정보를 안내하는 도로의 부속물이다(건설교통부 도로표지규칙). 항로 표지도 이와 비슷한 기능을 한다. 배가 항구까지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항해 지원 시설이어서다. 다만, 도로 표지와 달리 조금 복잡한 것이 다르다. 항로표지법에 나와 있는 내용은 이렇다. “항로 표지”란 항행하는 선박에 대하여 등광(燈光)ㆍ형상(形象)ㆍ색채ㆍ음향ㆍ전파 등을 수단으로 선박의 위치ㆍ방향 및 장애물의 위치 등을 알려주는 항행 보조 시설로서 광파(光波) 표지, 형상 표지, 음파 표지, 전파 표지 및 특수 신호표지 등 해양수산부가 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같은 항로 표지 중에서 가장 중심에 서는 것이 항로표지기술원과 등광(燈光), 즉 오늘의 주제인 등대다.
프랑스 등대 화가 라민(Ramine Devrest)의 등대 그림
ⓒ라민 홈페이지 검색(2023. 1. 11)
아하! 항로표지기술원
항로표지 업무는 기본적으로 해양수산부에서 담당한다. 해사안전국 산하의 항로표지과가 주무 부서다. 항로표지에 관한 기획, 운영, 문화, 기술, 항법, 국제 등 항로표지에 관한 모든 업무를 총괄한다. 법률로는 항로표지법이 시행되고 있다. 항로표지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이 들어 있다. 이 법률에서 중요한 것은 5년마다 항로표지에 관한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하도록 한 것과 항로표지기술원을 두도록 한 점이다. 항로표지기술원은 기존의 항로표지협회를 법정 기관으로 확대‧개편한 것이다. 이 분야의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항로표지에 관한 조사ㆍ연구ㆍ홍보, 국제협력 등에 관한 사업을 추진하도록 했다. 항로표지 전문인력을 양성ㆍ관리하는 업무뿐만 아니라 국립등대박물관과 등대 해양 문화공간 관리·운영 업무도 이곳에서 도맡아서 처리한다.
제20회 국제항로표지협회 총회 홈페이지
ⓒ국제항로표지협회 홈페이지 검색(2023. 1. 11)
항로표지와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국제항로표지협회(IALA)다. 항로표지에 관한 국제 통일기준을 정하는 비영리 국제기구다. IALA는 1957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등대 당국 대표가 모여 발족했다. 2021년 12월 말 현재 320개의 회원이 가입한 방대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국가 회원이 90개국, 준회원 기관이 74곳, 그리고 산업체 회원이 158개나 된다. IALA Annual Report 2021.
국제항로표지협회에서 하는 가장 큰 행사의 하나는 등대 올림픽이라고 일컬어지는 국제항로표지총회다. 2018년 우리나라에서 제19차 총회가 열려 ‘인천 선언’이 채택된 이후, 제20회 총회가 올해 5월 28일부터 브라질의 리오 데 자네이루에서 열린다. 이번 행사의 주제는 ‘항해 지원시설(AtoN) -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혁신’이다. 코로나19 여파로 4년마다 열리는 행사가 1년 늦춰졌다.
해양 문명의 아이콘
이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한 등대는 널리 알려진, 그러나 지금은 없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다. 기원전 280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2세 때 건축됐다는 기록이 있다. 파로스 등대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 때 건축에 들어가 2세 때 완공되었다고 함.
무려 2400년 전의 일이다. 현존하는 자료를 토대로 이 등대의 특성을 살펴보면, 높이가 무려 130미터, 안쪽에는 마차가 오갈 수 있는 통로까지 설치되었다고 한다. 야자나무 숯을 태워 밝힌 등댓불(광원)이 퍼져 나가는 길이(광달거리)는 43km였다. 당시의 건축 및 등대 기술이 어떠했는지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 칠흑 같은 바다에서 그 등불은 막막한 선원들에게는 가장 큰 구원의 불빛이었을 것이다. 광달거리가 길었다는 점은 그 당시에 벌써 선박이 연안을 벗어나 먼 항해에 나섰다는 의미다. 원양 항해 선박과 등대가 문명을 교류하는 통로였던 셈이다.
현존하는 세계 등대문화 유산
ⓒ세계등대협회 및 구글 검색자료(2023. 1. 11)
이 같은 등대는 그 후로 계속 기술적인 진보를 거치면서 세계 곳곳에 등장한다. 1900년 전인 1세기 로마 시대에 세워진 스페인 라 코로나 등대(헤라클레스 등대), 영국의 에디스톤 등대, 이탈리아 제노바의 란테르나 등대, 아일랜드의 훅 등대와 같은 현존하는 걸작품들이 세워졌다. 등대 기술도 빠르게 발전했다. 기술의 핵심은 불을 밝히는 광원과 등불을 멀리 쏘아 보내는 등명기 쪽이었다. 파로스 등대에서 숯을 피워 불을 밝히던 것이 횃불에 이어 16세기에는 양초를 광원으로 쓰는 등대도 등장했다. 18세기 들어 석유등 광원이 나오고, 아세틸렌가스 등이 출현한 이후 1960년부터는 전기등→할로겐전구→메탈 할라이드 전구 등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등명기의 효시는 1823년 프랑스 물리학자 오거스틴 장 프레넬이 처음 개발한 프레넬 렌즈다. 프랑스 지롱드 만에 있는 코르두앙 등대에 이 렌즈가 처음 사용된 이후 지금까지 수백만 척의 배를 구한 혁신기술로 구전된다. 유리의 굴절력과 많은 빛을 평행으로 발사하는 원리를 응용했다. 광달거리를 획기적으로 개선해 등대 기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프레넬 렌즈 등명기를 처음 사용한 프랑스 코르두앙 등대
ⓒ국제항로표지협회 홈페이지 검색(2023. 1. 11)
그런데 해양 문명의 아이콘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등대도 이제는 흘러간 추억으로 반추될 판이다. 위성항법시스템(GPS)과 e-내비게이션의 개발, 그리고 첨단 지상파 항법시스템(eLoran)의 보급 등으로 등대의 기능과 역할이 현저하게 줄었기 때문이다. 지금 2000년 넘게 세계의 바다를 지켜온 등대가 또 다른 기술의 등장으로 퇴역하는 중이다. 세계 곳곳의 등대와 등대 박물관이 다양한 등대 활용 프로그램을 만들고, 등대 투어 상품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변화를 반증한다. 바야흐로 등대가 항해 지원 시설에서 등대 문화유산이라는 해양 콘텐츠로 활용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우리나라 등대 화가 이성택 화백이나 프랑스의 라민(Ramine) 등이 등대를 다르게 쓰는 대표적인 사례임.
앞으로도 이 같은 경향은 더욱 짙어질 것이 분명하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단지 영원하다고 기억할 뿐이다. 독자 여러분의 가슴 속에는 세상을 밝히는 어떤 등불을 갖고 계시는지요?
스웨덴의 대표적인 등대 선박 핀그룬트 호
이 선박은 현재 운항하지 않고,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바사 호 박물관 옆에 정박하여
‘등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등대를 전시 주제로 하는 대표적인 등대 해양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등대 선박도 있다. 배에 등대 시설을 설치한 다음 곳곳을 운항하면서 육상에 있는 등대와 같은 기능을 한다. 주로 등대를 설치하기 어려운 강 하구 나 암초가 많은 곳에 정박하여 등불을 밝혀 준다. 일반적으로 선체는 암적색으로 칠하고, 선 측에는 흰색으로 등대 선박의 이름을 적는다. 세계 최초의 등대 선박은 영국 등대협회(Trinity House)에서 모래가 많은 템즈 강 하구 지역을 밝히기 위해 1793년에 건조한 노어호(NORE)다. 이 등대 선박은 처음 건조된 이후, 같은 명칭으로 여러 차례 복원되어 1996년에 개인 수집가에 매각된 것으로 알려졌음.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주)에코트라 오션 랩
연구개발본부장, 법학박사
해양 전문지 『디 오션』, 『오션 테크』, 『환동해 경제학』 등을 공동기획하고, 같이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