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INESS 크루즈 건조 세계1위 조선소, 그들은 늘 먼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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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칸티에리(Fincantieri)를 제대로 알려면, 글로벌 크루즈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는 것이 먼저다. 시장 규모부터 살펴보자. 2021년 기준으로 세계 크루즈 회사는 대략 70개다. 이들 회사가 운항하는 크루즈 선은 400척이다. 지중해, 중남미, 하와이, 북유럽, 동남 아시아 지역을 고정적으로 운항한다. 연간 2,500만 명 가량이 크루즈선을 이용해 여행을 즐기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수치는 2026년에는 3,820만 명, 2030년에는 4,600만 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적어도 연평균 6∼8%의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인다는 전망이다.
크루즈 산업 핵심 체크
이 같은 크루즈 시장을 카니발(41.8%)과 로얄 캐리비언 크루즈(23.3%), 노르위전 크루즈 라인(9.4%), 그리고, 세계 최대 컨테이너 선사인 MSC의 자회사 MSC 크루즈(8.0%) 등 4대 메이저 그룹이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 특히, 크루즈 시장의 거의 절반을 독점하고 있는 카니발의 경우, 카니발이라는 자체 브랜드뿐만 아니라, 코스타‧프린세스‧큐나드 라인 등 모두 9개의 자회사 또는 별도의 브랜드를 달고, 시장을 움켜 지고 있다. 다른 크루즈 선사 또한 이와 큰 차이가 없다. 크루즈 판(版), 그들만의 리그인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나온 크루즈 선 가운데, 가장 큰 배는 어떤 것일까? 2022년 5월부터 운항에 들어간 로얄 캐리비언 크루즈의 ‘원더 오프 더 시즈’(Wonder of the Seas, 23만 톤)다. 배 길이가 무려 362미터. 승무원 2,300명과 유람 승객 6,988명 등 거의 1만 명이 탈 수 있는, 떠다니는 해상도시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배는 우리나라와 인연이 있다. 2016년에 STX 프랑스가 처음 건조계약을 맺었다가, STX 그룹이 해체되면서 이 회사를 인수한 프랑스 상티에 드 라틀란티크 조선소에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STX 그룹이 파산하지 않고 아직까지 살아남았다면, 아마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큰 크루즈 선박을 건조한 나라로 등극했을 것이다. 명실상부한 조선 강국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크루즈 선, ‘Wonder of the Seas’
©로얄 캐리비언 크루즈 홈페이지
유럽 3개국이 시장 독점
이 같은 크루즈 선을 만드는 조선소는 몇 나라로 특화되어 있다. 이탈리아 핀칸티에리(Fincantieri), 독일의 메이어 베르프트(Meyer Werft), 프랑스의 상티에 드 아틀랑티크(Chantiers de l'Atlantique) 등 유럽의 3대 조선소가 건조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어서다. 세 나라가 오래 전부터 글로벌 크루즈 선 조선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 크루즈 선을 짓는데 필요한 최적의 산업 생태계가 두텁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크루즈 선은 선박 구조상 수면 위쪽으로 올라온 부문이 많고, 폭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내부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지지구조물을 최대한 생략하고,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얇은 강판을 사용한다. 배의 크기에 따라 수백에서 수천 개의 표준화된 객실이 외부에서 사전 제작되어 건조 선박에 설치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승객의 안전과 편리, 그리고 쾌적성을 유지하기 위해 건조조건과 기준이 매우 까다롭다. 특히 크루즈 선을 건조하는 데는 수많은 선박 기자재가 들어간다. 기자재 업체가 뒤에서 받쳐 주지 못하면 지탱하지 못하는 곳이 이 시장의 구조다. 또한, 전문인력과 건조 공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테리어 설계 능력도 담보되어야 한다. 선박 가격이 컨테이너선 등 일반 선박에 비해 3∼5배 가량 비싼 데도 조선 강국이라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거니와 일본‧중국이 이 시장에 쉽게 도전장을 내밀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크루즈 선, ‘Wonder of the Seas’
©로얄 캐리비언 크루즈 홈페이지
1780년의 핀칸티에리
핀칸티에리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글로벌 조선 그룹이다. 크루즈 선뿐만 아니라, 여객선, 군함, 메가 요트, 석유 시추 설비와 해양플랜트 서비스 선박(OSV) 등 부가가치가 높은 특수 선박을 전문적으로 만든다. 선박 수리와 개조, 판매한 선박의 AS 서비스도 이 회사의 중요한 수익원의 하나다. 물론 핵심 비즈니스 영역은 크루즈 선과 군함 건조, 그리고 2013년에 인수한 노르웨이 해양플랜트 조선 기업인 바드(VARD)다. 230년 전인 1780년 이탈리아 카스텔마라에서 처음으로 배를 건조한 이후 2021년 기준으로 모두 7,000척이 넘는 선박을 인도했다. 4개 대륙에 걸쳐 모두 18개의 조선소를 갖고 있으며, 이곳에서 일하는 근로자 수는 2만 명이 넘는다. 회사 규모도 매머드 급이다. 핀칸티에리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자회사와 계열사를 모두 합치면 27개나 된다. 자회사와 계열사 아래에도 수많은 기업이 종적‧횡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2021년에 핀칸티에리가 벌어들인 영업이익은 코로나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69억 유로에 달했다. 전년보다 28.3% 늘어난 수치다. 값비싼 크루즈 선 8척과 해군 함정 7척 등 모두 15척을 인도한 것이 이 같은 실적 상승을 견인했다. 핀칸티에리의 성장세를 이끄는 힘은 연구와 혁신 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다. 2021년의 경우 이 부문에 쏟아부은 예산이 1억 5500만 유로였다. 해마다 연간 매출액의 5% 가량을 R&D에 배정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세계 제일의 사업 다각화와 혁신 기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유다. 핀칸티에리의 혁신 DNA는 이 회사의 과거 역사에서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핀칸티에리 조선소 및 선박 종류
©핀칸티에리 홈페이지 검색자료
혁신이 회사의 성장동력
시계추를 230년 전으로 돌려보자. 핀칸티에리 조선소가 설립된 1780년이면, 우리나라에서는 연암 박지원이 말 타고, 청나라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열하일기를 썼던 해다. 그해 바다 건너 이탈리아에서는 핀칸티에리가 벌써 화객선을 건조하고 있었다. 1912년에는 지중해에서 진수된 가장 큰 배(카이저 프란츠 조셉)를 지었고, 1923년에는 이탈리아에서는 처음으로 대형 정기여객선을 건조했다. 1927년과 1931년에는 각각 수영장이 딸린 배와 에어컨이 설치된 선박을 선보였다. 1932년, 당시로서는 선박 속도가 가장 빠른 대서양 횡단 원양 여객선(렉스)을 출시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크루즈 선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코스타 크루즈 선박을 1966년에 만들었다. 남들보다 발 빠르게 시장을 선도하면서 혁신을 회사의 성장 동력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핀칸티에리 건조 선박
©핀칸티에리 홈페이지 검색자료
전문가들은 핀칸티에리가 세계 정상으로 우뚝 선 이유를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건조작업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관된 작업 공정을 꼽고 있다. 크루즈 선을 다른 곳보다 빠르게 건조할 수 있는 도크 운영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필요한 경우 팔레르모 등 이탈리아에 있는 자사의 3개 크루즈 조선소와 연계작업도 마다하지 않는다. 최근에 핀칸티에리는 이 같은 신속 건조 공정에 디지털 트윈 기술을 접목하였다. 사전에 완벽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오차 없이 배를 만드는 노하우를 덧붙인 셈이다.
둘째, 자체적으로 2개의 디자인 및 기술연구소를 운영하는 등 연구개발사업에 상당한 비용을 투자한다. 셋째, 전문인력을 확보하는 데도 매우 적극적이다. 이 회사는 이탈리아의 3개 대학교와 협정을 맺어 적재적소에 인재를 투입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목은 선박을 만드는 조선 기자재 산업 생태계를 스스로 만들고, 확대하고 있는 점이다. 7,000개가 넘는 부품 공급업체가 이 회사와 연결되어 있고, 배 건조에 들어가는 장비의 75%를 ‘메이드 인 이탈리아’로 충당할 정도로 친밀하게 얽혀 있다.
핀칸티에리 향후 크루즈 선 기술 변화 예상
©핀칸티에리 2021 연차보고서
나머지 한 가지는 미래 성장 동력을 끊임없이 찾는다는 점이다. 핀칸티에리는 최근 지구촌을 공포에 떨게 한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그룹 경영을 재구조화하는 한편, 다음과 같은 미래 먹거리를 발굴에 나섰다. 1) 인력을 대체할 수 있는 로봇 자동화 건조 공정을 개발하고 있다. 2) 2050년 탈 탄소화 시대에 대비해 전기 및 수소 추진 크루즈 선(선박명 ZEUS)을 건조하는 한편, 3) 다국적 재생에너지 기업인 에넬(Enel Green Power Italia)과 항만에서 그린 수소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통합솔루션 개발사업에 들어갔다. 4) 차세대 전력원으로 평가되는 리튬 배터리 산업에 진출하기 위해 Power4Future 라는 조인트 벤처회사도 설립했다.
그리고, 하나 더. 선박용 강재를 생산하는 제철소를 친환경 시설로 바꾸는 작업도 착수하였다. 핀칸티에리는 최근 주주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약점을 강점으 바꿔 나가는 대범한 혁신전략을 추진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다.' 핀칸티에리는 2014년 이탈리아가 국가 부채를 줄이는 과정에서 국영기업에서 민영화되었다. 정부 장악에서 벗어난 이후 경쟁력이 한층 강화되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혁신의 DNA 라는 수식이 붙은 이 회사가 향후 어떤 향배를 보일지 관찰하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핀칸티에리에서 개발하고 있는 Zero Emission(ZEUS) 선박
©핀칸티에리 홈페이지 검색자료
조선 강국 대한민국은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한때 크루즈 조선 강국이 될 뻔했다. 당시 강덕수 회장이 이끄는 STX 그룹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노르웨이의 아커 야드(Aker Yards)를 인수하면서 크루즈 선 건조라는 야망을 키웠기 때문이다. STX는 아커 야드를 통해 프랑스의 자존심이라고 평가받던 ‘상티에 드 아틀랑티크 조선소’를 합병했다. 그 후 두 회사를 STX 유럽으로 묶어 사세를 키우는 등 조선 사업 다각화에 나섰다. 그러나 STX 그룹은 글로벌 경기 침체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도산하고 말았다. 크루즈 조선 대국이라는 비전도 이 때 사라졌다.
퀸 제누비아 호 및 비욘드 트러스
©구글 검색자료
우리나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조선 강국이다. 컨테이너 선 건조에 탁월한 실적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메탄올 선박 등 친환경 선박을 건조하는 기술을 바탕으로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크루즈 선 등 부가가치가 높고, 산업의 전후방 효과가 큰 특수 선박 건조에 있어서는 유럽 국가를 당해내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국내 조선소에서 지어진 퀸 제누비아(2020) 호와 비욘드 트러스트(2022) 호가 제주 항로에 투입되었다. 이 선박들은 크루즈 선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상은 성능과 시설이 향상된 카페리 선박에 지나지 않는다. 핀칸티에리를 따라잡을 크루즈 조선 강국의 꿈을 다시 키워야 한다.
최재선
(주)에코트라 오션 랩
연구개발본부장, 법학박사
해양 전문지 『디 오션』, 『오션 테크』, 『환동해 경제학』 등을 공동기획하고, 같이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