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INESS 정말 이럴 거야, 정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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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은 생선이다.
말 많은 생선이 정어리(sardine)다. 이름 유래부터 석연치 않다. 일각에서는 이탈리아 사르데냐에서 따 왔다고 한다. 어떤 분은 15세기에 처음 정어리라는 이름이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크기를 기준으로 이름을 달리 부른다. 15센터 미터 이하면 사딘(sardine)이고, 그보다 크면 무조건 필차드(pilchard)다. 우리나라는 크기와 상관없이 그냥 정어리다. 종류만 해도 무려 22종이다. 사는 곳에 따라 유럽 정어리, 태평양 정어리, 인도양 정어리라는 이름도 붙인다. 망국어(亡國魚)라는 별칭도 있다. 일제시대 한반도를 침탈한 일본이 정어리기름을 짜 군수용으로 쓴 데서 비롯됐다. 기름을 짤 정어리가 사라지자 일본이 망했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다. 이름만큼이나 정어리의 서식 환경이나 이동 경로 등은 명확하지 않다. 지난해 남해안 마산만에서 떼죽음을 당한 정어리의 사망 원인도 아직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따뜻한 바다에서 플랑크톤을 먹고 사는 정어리를 미스터리 생선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정어리를 잡는 모습 ©Al Jazeera Media Network
포르투갈 국민 생선
그럼에도 정어리에 진심인 나라가 있다. 대서양 연안의 포르투갈이다. 이 나라에서 정어리는 국민 생선이다. 먹거리는 물론 산업, 예술,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정어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요리뿐만 아니라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제공하고 있어서다. 특히 이 몸 작은 물고기가 포르투갈에서 국민 대표 생선으로 등극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종교적인 배경이 거론된다. 리스본을 수호하는 성인(聖人)인 성 안토니오가 사람들에게 성령을 전하기 위해 고민하던 중 말귀를 알아듣는 정어리를 신의 메신저로 활용했다는 전설이다. 하느님이 정어리를 통해 계시를 줌으로써 성 안토니오는 더욱 적극적으로 포교 활동에 나서게 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정어리를 먹으며 풍어를 기원했다고 한다. 이 같은 전통이 계속 이어져 지금도 리스본에서는 매년 6월만 되면 정어리를 구워 먹는 성 안토니오 축제가 열린다. 이때 시내 골목골목은 정어리 굽는 냄새로 가득 차고, 도시는 전통 복장을 차려입은 청춘남녀들의 들뜬 퍼레이드로 한껏 달아오른다.
리스본의 정어리 축제 ©Al Jazeera Media Network
구운 정어리를 맛있게 먹는 법 ©2024 Devour Tours, part of Hornblower Group
©Portugal.com
산업이 된 정어리
포르투갈에서 정어리를 산업으로 이끈 것은 통조림이다. 19세기 초에 개발된 통조림 가공 방법을 정어리에 접목하여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 냈다. 본래 통조림은 1804년에 프랑스 세프인 니콜라스 아페르가 고안한 특허다. 그 당시에 밀폐 용기에 음식을 넣어 보존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혁신 기술이었다. 영국인 사업가 조셉 피에르 콜린은 이 기술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하여 1820년에 프랑스 낭트에 정어리 통조림 공장을 지었다. 마침내 통조림의 대량 생산 시대가 열렸다. 40여 년이 지난 1866년에 포르투갈에 첫 정어리 공장이 들어섰다. 지금까지 그 명성이 남아 있는 포르투갈 최대 통조림 회사 라미레즈다(이 회사의 정어리 브랜드가 노란색 디자인으로 유명한 누리(Nuri다). 이 공장은 지금도 정어리, 참치, 고등어 통조림을 만들어 판다.
정어리를 가공하는 모습 ©Al Jazeera Media Network
프랑스에서 발달한 정어리 가공산업이 포르투갈로 넘어온 것은 순전히 정어리 탓이다. 프랑스 연안에서 어획되는 정어리가 고갈된 반면, 포르투갈에서는 자원량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을 계기로 포르투갈의 정어리 산업은 크게 성장한다. 영양가가 높고, 보관과 운반하기가 쉽다는 장점이 부각되면서 전투식량으로 대량 보급된 것이 그 이유다.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1950년대까지 통조림 가공 공장은 무려 400개로 늘어났다. 그리고 외국 수출이 증가하면서 정어리 통조림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글로벌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여러 가지 모습의 정어리 통조림 ©wetravelportugal
정어리 통조림 요리 모습 ©The New York Times Company
포르투갈의 정어리 통조림 판매점 ©getyourguide
정어리 양식 시대
캔에 담긴 정어리는 포르투갈 산업과 미식의 상징이다. 리스본이나 포르투 거리를 걷다 보면 여러 가지 소스가 들어간 정어리 통조림을 살 수 있는 상점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생생한 프린트, 클래식한 디자인, 심지어 식용 금으로 도금된 캔도 있다. 귀국 기념품으로 손색없을 정도로 특색있고, 각양각색이다. 지금도 포르투갈에서 정어리는 산업이고, 문화인 동시에 일상이다. 그러나 그동안 100년을 이어온 영광의 시대가 이제는 저물고 있다. 잘나가던 시절 수백 개에 달하던 가공 공장은 14개로 쪼그라들었다. 300척이 넘던 정어리잡이 배도 손에 꼽을 정도다. 프랑스 연안에서 정어리가 줄었던 것처럼, 이베리아 바다의 자원량도 크게 감소하고 있다. 한때 연간 20만 톤 넘게 거둬들일 수 있었던 정어리의 씨가 마르고 있다. 급기야 유럽연합(EU)은 2019년에 이 지역의 정어리를 총 어획한 도량(TAC) 대상 어종으로 묶어 버렸다. 올해 이곳에서 잡을 수 있는 정어리 최대한도는 1만 800톤에 지나지 않는다. 부족한 물량은 스페인과 네덜란드 등지에서 수입하고, 양식으로도 충당한다는 계획이다. 그 사이 아프리카 모로코가 정어리 대국으로 떠올랐다. 우리 바다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그동안 자취를 감췄던 정어리가 급증하면서 지난해에 무려 4만 8,000톤이 잡혔다. 너무 많이 잡히는 바람에 비상이 걸렸다. 정말로 정어리는 이상한 생선이다.
(위) 여러 가지 정어리 상품 ©wetravelportugal, ©Castelbel
(아래) 정어리 상품 판매 상점 ©Portugal.com
최재선
(주)에코트라 오션 랩
연구개발본부장, 법학박사
해양 전문지 『디 오션』, 『오션 테크』, 『환동해 경제학』 등을 공동기획하고, 같이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