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도시 크라이스트처치, 남극의 관리자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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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항로도시 시리즈를 읽는 독자라면, 처음에 왜 남극의 도시 크라이스트처치가 등장할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극지(極地) 분야에서 북극과 남극은 별개의 공간이 아니라, ‘관문도시(Gateway City)’라는 하나의 공통된 좌표로 연결된다. 북극항로의 거점 도시가 해상 물류와 정책 협력의 출입구가 되듯, 크라이스트처치는 200년 가까이 남극 대륙으로 들어가는 세계 최고의 관문도시로 기능해 왔다.
따라서 크라이스트처치를 살펴보는 것은 남극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산이 북극항로의 관문도시로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참고해야 할 가장 완성도 높은 ‘극지 도시 모델’을 분석하는 과정이다. 이 글은 바로 그 관점에서, 크라이스트처치가 어떻게 남극의 관리자도시로 자리매김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마운틴 쿡 전경
©장하용, (촬영일 : 2023.11.1.)
남위 43도에 위치한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는 남극 대륙과 문명 세계를 연결하는 정교한 플랫폼을 구축한 '남극의 관리자 도시(Custodial city)'라 할 수 있다. 인구 39만의 이 도시는 세계 5대 남극 관문 도시(칠레 푼타아레나스,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남아프리카공학국 케이프타운, 호주 호바트,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중에서도 가장 고도화된 산·학·연·관 협력 모델을 보유하고 있다. 매년 100편이 넘는 항공편이 크라이스트처치 국제공항과 남극 맥머도 기지 간의 루트를 오가며, 수십 척의 연구선과 쇄빙선이 리틀턴 항구를 거쳐 남극으로 향한다. 남극대륙 연구의 상당 부분이 로스해 인근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중심에 크라이스트처치가 있다.
로스해 루트의 독점적 지위
1959년 12개국이 서명하여 체결된 남극 조약은 현재 57개국이 가입한 국제 협력의 상징이 되었다. 이 중 29개국이 남극대륙에 상주 기지를 운영하고 있으며, 남극의 기후 변화 연구는 전 지구적 기후 위기 대응의 핵심이 되고 있다.
이러한 남극 상주기지의 지원에 있어 크라이스트처치의 지정학적 위상은 독보적이다. 남미의 푼타아레나스와 우수아이아가 남극 반도로 향하는 접근성에 집중한다면, 크라이스트처치는 남극 대륙의 심장부인 로스해 권역으로 진입하는 핵심 루트다. 로스해 지역은 대한민국 장보고과학기지를 비롯해 미국 맥머도, 뉴질랜드 스콧, 이탈리아 마리오 주첼리, 중국 친링 등 주요 기지가 밀집한 과학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크라이스트처치 시의회는 지정학 이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4대 남극 관문 전략(Antarctic Gateway Strategy)'을 수립하여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가치 극대화를 통한 경제적·과학적 효과 창출, 카이티아키탕가(환경 수호)를 통한 지속 가능한 지원, 마나키탕가(환대)를 통한 최상의 서비스 제공, 그리고 연결성 강화를 통한 시민 참여와 산학관 협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극 지원 사업을 도시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는 미래 먹거리로 정의하는 전략적 접근이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전경
©장하용, (촬영일 : 2023.10.29.)
영웅의 시대에서 계승된 유산
크라이스트처치가 본격적으로 남극 도시로 발돋움한 것은, 1901년 로버트 팔콘 스콧 선장의 디스커버리 원정대가 리틀턴 항구를 기점(출발지)으로 선택하면서부터다. 1910년 테라노바 원정대, 어니스트 섀클턴의 1907년 님로드 원정대가 뒤를 이었다. 도심의 옥스퍼드 테라스에 서 있는 스콧 대령의 대리석 동상은 1917년 제막되었으며, 2011년 대지진으로 파손되었을 때 시민들이 느낀 상실감은 컸다. 2017년 스콧의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원형 그대로 복원된 동상은 크라이스트처치가 남극 유산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보여준다.
도시에 본부를 둔 남극유산신탁(Antarctic Heritage Trust)은 로스해 지역에 남아 있는 스콧과 섀클턴의 오두막을 보존한다. 최근 미 해군 데이브 베이커 대령이 60년 전 가져간 스콧 원정대의 유물들을 반환한 사례는 크라이스트처치가 남극 역사의 수호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1955년 미국의 딥프리즈 작전이 시작되면서 크라이스트처치 국제공항은 남극으로 가는 항공 관문이 되었다. 1996년 설립된 Antarctica New Zealand는 크라이스트처치를 본부로 삼았고, 1957년부터 운영 중인 스콧 기지를 통해 로스 의존령을 관리하고 있다.

크라이스트처치와 캔터베리 지역의 창립자인 존 로버트 고들리 동상
©장하용, (촬영일 : 2023.11.2.)
국제남극센터, 남극 체험의 심장부
크라이스트처치가 세계 남극 연구의 중심이 된 가장 큰 이유는 국제남극센터(International Antarctic Centre)의 존재 덕분이다. 1992년 완공된 이 남극 체험·연구 복합시설은 크라이스트처치 국제공항에서 도보로 불과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어 접근성이 탁월하다. 일반인에게는 남극 체험 공간으로, 연구자들에게는 연구 지원 시설로 기능하는 이곳은 연간 수만 명의 관광객과 연구원이 방문한다.
국제남극센터의 체험 프로그램은 광범위하다. 남극의 혹한을 체험할 수 있는 '남극폭풍 체험관'에서는 영하 18도의 추위와 시속 40km의 블리자드를 경험할 수 있다. 방문객들은 방한복과 극지 전용 방한화를 신고 어두운 조명 속에서 눈보라를 견뎌내며 남극의 극한 환경을 체감한다. 이 체험관을 같이 방문한 부산의 중고등학생들은 "이글루가 따뜻하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실제 남극 겨울 폭풍은 영하 89도까지 떨어지지만, 여름 폭풍 수준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다."고 증언했다.
'허글랜드 라이드(Hägglund Ride)'는 남극 탐험용 수륙양용 설상차(대당 약 14억 원)를 타고 45도 경사 언덕, 울퉁불퉁한 지형, 물웅덩이를 가로지르는 체험이다. 특히 정상에는 남극의 크레바스와 유사한 50cm 가량의 틈을 조성해 관람객에게 남극과 유사한 경험을 제공한다. 설상차 중 한 대는 40년이 된 실제 한국기지 대원들이 타던 차량으로 대한민국 극지연구소(KOPRI)에서 기증한 것이다. 이는 한국과 뉴질랜드 간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4D 익스트림 시어터에서는 첨단기술이 접목된 남극 영화를 통해 쇄빙선과 유빙의 충돌, 차가운 빙하수가 몸에 닿는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리틀 블루 펭귄(Little Blue Penguins)' 사육장에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펭귄(약 45cm) 15마리가 살고 있다. 이들은 포식자에게 공격당하거나 보트에 부딪혀 장애가 생긴 개체들로, 센터가 보호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생태계 보호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며, 방문객들에게 남극 생태계 보존의 필요성을 전달한다.
이 센터의 운영 방식은 독특하다. 뉴질랜드 공항공사 소유지에 건설되었으나 운영은 시의회와 연계된 독립 법인이 담당하며, 바로 옆에 위치한 연구 기관들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최신 연구 성과를 전시에 즉각 반영한다. 이는 '연구-교육-관광'의 선순환 구조를 만든 모범 사례인 것이다.

국제남극센터와 허글랜드 라이드
©장하용, (촬영일 : 2023.10.30.)

대한민국 극지연구소에서 기증한 설상차
©장하용, (촬영일 : 2023.10.30.)


장하용
부산연구원 미래전략기획실장
책임연구위원
공학박사
해양정책의 방향은 변화의 흐름 속에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해양정책·국가 전략 수립 및 미래 해양도시비전 연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