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화 해양도시 부산의 가장 평화로웠던 시간
페이지 정보

본문
부산은 오늘도 부산스럽지만 과거에도 부산스러운 곳이었다.
복된 지리적 요인으로 산, 강, 바다가 어우러져 먹거리가 풍부하고 해양성 기후로 인한 따뜻한 기온으로 천혜의 아름다운 부산스러운 해양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북쪽은 중국의 변방으로 조공을 바치고, 몽고의 칸에 침략당하고 남쪽은 왜구의 출몰로 힘든 역사가 이어져 갔다. 한일 양국은 다방면에서 역사적인 앙숙이었다. 정치, 경제, 문화, 심지어는 스포츠 분야에서는 종목을 따지지 않고 목숨을 걸고 절대 지지 않으려고 한다. 심지어는 일본에게 가위바위보마저도 져서는 안 된다는 유행어도 있다. 시쳇말로 단군 할아버지의 부동산 구매 실패(?)로 인해 일본과 우리는 지정학적인 이웃 국가이며 동아시아의 구성원으로, 중국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지리학적 더부살이의 운명을 공유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일본과 우리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삶에 힘들고 고단한 역사를 남기게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는 일본과 사이가 지극히 좋지 않았다. 이에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국가적으로 일본과의 친화 정책을 펴게 된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사정을 살피고 일본과의 우호를 유지,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제대로 전쟁을 걸어오면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하게 된 조선은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아야겠다는 단호한 생각과 전쟁을 사전에 미리 방지해야 하며, 그것이 어렵다면 적어도 언제쯤 터질지는 알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이를 위해서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요즘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정탐할 필요가 있다고 보며 전쟁을 걸어오지 않도록 우호적으로 지낼 필요가 있었는데, 조선통신사가 바로 그 평화 전도사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통신사는 바로 평화 우호를 위해 파견된 외교관이었다. 그 외교관의 행렬 중심에 부산이라는 해양도시가 있었다. 부산은 통신사의 출발점이 있었다. 부산은 뱃길을 통해 일본의 대마도와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되며 일본의 경제, 문화 및 다양한 분야에 영향력을 조고 받은 도시였다. 일본은 섬나라로서 한반도 보다 많이 일어나는 자연재해를 두려워하며 다양한 신에게 국가와 국민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였다. 치명적인 자연재해로서는 태풍, 지진과 그로 인한 해일과 월파였으며 이를 일본어로 쓰나미(津波)라고 하는데 이것이 국제공용어가 되었다.
섬나라 일본의 먹거리는 어업과 농업에 국한되어 기후 변화에 민감하며 이에 늘 큰 파도와 큰 바람을 두려워했다. 일본의 에도시대 1800년경에 우키요에라는 일본의 전통 미술 속에는 큰 파도의 그림이 등장하며 자연에 대한 경각심을 통한 일본 자국민의 안녕을 도모하였다. 자포니즘(Japonism)의 원천이 된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라고 하는 일본의 화가가 그린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 아래>에는 일본의 후지산과 어우러진 큰 파도가 대표적이다. 큰 파도 앞에서 후지산도 떨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호쿠사이,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 아래>, 목판화, 종이에 먹과 채색
ⓒWilliam Sturgis Bigelow Collection, Photograph Museum of Fine Arts, Boston
조선통신사는 1607년에 행렬의 시작으로 1811년까지 이어졌다. 해양도시 부산은 행렬의 시발점이 되어 일본까지의 험한 바닷길에서의 무사안일을 기원하며 힘차게 출발하였다. 이 시기가 한·일 관계의 가장 평화로웠던 시절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기록들을 살펴보면 조선통신사가 진행되었던 과정에서 서로 시를 지어주고 물건을 교환하거나 마상재(馬上才) 같은 공연을 선보였으며, 통신사의 행렬을 그림이나 기행문 등으로 기록하는 등 파생된 문화 교류가 많아 가치가 높다. 한일 양국은 이 조선통신사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 등재를 갈망하며 추진하여, 2017년 10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확정되었다.
에도(도쿄의 옛 지명) 시내를 지나가는 조선통신사의 긴 행렬, 고베시립박물관
ⓒ위키피디아
에도성에서 쇼군에서 선물할 도자기와 호피를 준비하고 있는 조선통신사(고베시립박물관)
ⓒ위키피디아
부산 동구 초량(草粱)이라는 곳에 왜관(倭館)이 있다. 왜관은 말 그대로 왜인들이 살았던 일본식 건물이며 조선시대에 일본인이 조선에 와서 통상하던 곳을 말하며, 그곳에 설치된 행정 기관과 일본인 집단 거주 지역을 일컬어 부르는 말이다. 요즈음으로 치면 상공회의소와 대사관을 합쳐 놓은 개념이다.1) 역사적으로 부산의 동구는 조선시대 일본인과의 불편한 동거와 함께 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초량역 5번 출구 앞에는 정발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정발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과 첫 전투를 하고 첫 번째로 순절한 첨사이다.
1) https://namu.wiki/w/%EC%99%9C%EA%B4%80 왜관의 뜻
부산에 상륙한 왜병은 서양 네덜란드에서 공수해 온 조총으로 위협하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조총을 든 왜군을 맞아 정발 장군은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그도 전사하였다. 이에 이순신 장군만큼의 유명세는 아니지만 부산을 위해 의절하신 정발 장군의 용맹스러움과 무용담 확산을 위해 항일거리가 동상 설립 이후에도 만들어졌다.
부산시 동구 초량에 있는 정발 장군의 동상
ⓒ홍동식
왜구의 노략질과 침공은 이때뿐 아니라 고려시대도 자주 있었기에 부산이라는 도시는 동래 산성을 중심으로 바닷가 쪽은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위험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높으신 분들과 귀족은 내륙, 즉 동래를 중심으로 삶을 이어 나갔다. 지금은 부산에서의 경제와 부의 척도인 부동산 최고의 고부가가치 지역은 해운대와 광안리를 중심으로 한 해안가 라인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이 해안가 라인을 통해 근래의 부산은 더욱 해양도시의 인프라를 견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에서 우수한 문화예술인, 외교관들을 400-500명을 선발하여 이러한 부산 해양도시에 집결하여 일본 막부 정부에 파견한 사절단을 말한다. 해양도시 부산에서 대마도(쓰시마), 시모노세키, 오사카, 교토, 나고야, 시즈오카 도쿄, 그리고 니코까지 가는 긴 여정이었다.
해양도시 부산에서는 조선통신사의 역사성을 기리기 위해 부산문화재단 문화유산팀에서 운영하는 조선통신사 역사관2)이 만들어졌다. 조선통신사를 통해서 200여 년간에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없었고, 평화와 선린우호의 관계가 지속됨에 가장 큰 의미를 둔다. 이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라는 가장 큰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었다.
2)조선통신사 역사관은 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99에 위치하고 있으며 매년 조선통신사 축제와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부산에서 일본 시모노세키)을 하며 조선통신사의 역사 및 행적, 한일문화 교류의 장을 만들어 가도 있다. 홈페이지는 http://www.tongsinsa.com/html/
하지만 이를 상징할 수 있는 상징물 디자인이 오랜 기간 부재였다. 조선통신사 관련 다양한 축제와 뱃길 탐방, 유네스코 등재 기념 이벤트 진행에 따른 상징물이 없어 저자에게 디자인 개발을 의뢰하였다. 굉장히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과업이지만 한편은 한국과 일본을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시각적으로 상징하지 말아야 하고 한국과 일본의 아이덴티티가 함께 녹아들어 간 추상적인 의미의 디자인 상징물을 개발한다는 부담은 정말 크게 다가왔다.
저자 연구실의 박사과정생과 오랜 기간 고민을 함께 하며 관련 자료를 찾으며 디자인 사고를 좁혀 갔다. 그 결과 조선통신사의 가운데 글자인 통할 통(通)을 대표 상징 요소로 활용하기로 하고 通을 활용하여 시각적 요소들을 형상화하여 갔다. 사절단들은 해양도시 부산을 통하고 긴 행로를 이어가며 평화로운 외교정책을 펼쳐 나갔다는 핵심 요소로 모든 길은 하나로 通 하였다고 표현하기로 하였다. 이에 도출된 디자인 시안들이다.
시안 A(좌) 한일 양국의 국기가 조화롭게 겹쳐진 조형적 어우러짐을 상징
시안 B(우) 한일 양국은 하나의 길로 통하여 평화 수교한다는 긍정의 아이콘을 표현
ⓒ홍동식
시안 C(좌) 사절단의 청홍색 리본들이 어우러진 모습과 타이포그래피 속에 양국의 교류를 상징
(우) 조선통신사 교류단의 흥겨운 공연과 마상재의 형상을 활용한 그래픽 소스의 개발
ⓒ홍동식
관계자들과 몇 번의 프레젠테이션과 줄다리기 회의를 거쳐 상징물 디자인이 결정되었다.
최종 선정 조선통신사 상징물 디자인
ⓒ홍동식
최종 선정된 디자인을 살펴보면 통할 통(通) 속에는 다양한 의미 부여가 되어 있다. 첫 번째로 조선통신사의 긴 여정을 알리는 길이 한글로 왼쪽에 표기되어 있다. 두 번째로 길 위를 달리는 말의 힘찬 발길질과 한복의 아름다운 옷고름이 투영되어 있다. 세 번째는 한국과 일본의 평화로운 수교를 상징하며 푸른색과 붉은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매듭의 묶음 모양을 통하여 귀한 선물을 정성스럽게 포장한 마음이 녹아있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하였다.
조선통신사 상징물 디자인의 의미 부여된 조형적 요소들
ⓒ홍동식
조선통신사 상징물은 2018. 10. 25. 조선통신사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유산등재 1주년 기념행사에서 공식 발표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부산시장, 일본 시모노세키시장, 나가사키시장, 쓰시마시장 등 한일 양국 간 관련도시의 대표자들께서 함께 자리하며 양국 해양도시의 발전과 우호증진 그리고 해양도시 부산의 가장 평화로웠던 시간을 되새김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조선통신사 상징물 디자인 개발 과업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일본에 태어난 저자에게 양국 우호에 조금이나마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어 인생 디자인(?)이라 일컬을 수 있다. 미약한 상징물 디자인이지만 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평화와 부산한 해양도시 부산의 무궁한 번영을 위해 잠시 묵도한다.
홍동식
부경대학교 시각디자인 전공 교수
그래픽디자이너 및 교육자
그래픽 디자인과 현대 미술의 경계를 넘어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고 세계 유수디자이너들과 함께하는 다양한 전시회에 참가했다.
작품은 NYADC, Graphic, Eco-Plakat Poster Biennale 등 다양한 디자인 콤페티션에 출품하여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포스터 중 하나는 The Stedelijk Museum Amsterdam에 의해 소장 되었으며,
세계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통신사, 朝鮮通信使>의 상징물을 디자인 했다.
최근에는 더욱 풍토적 디자인의 요소와 타이포그래피에 매료되어 다양한 모습과 현황을 찬찬이 돌아보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