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산업 못 생긴 게 어때서! 못난이 수산물 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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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이 수산물의 반란
나는 본래 B급이다. A급은 쭉쭉빵빵, 모든 게 잘났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조금 흠이 있거나 약간 모자란 것처럼 보여서다. 규격에서 벗어나 있고, 잘 생기지도 못해 홀대를 받아왔다. 등외품(等外品)이라고 평가절하도 한다. 그런데 그 누가 알았을까? 지금 바야흐로 나의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다. 생긴 거는 이상하나 맛과 영양가는 A급과 진배없다는 입소문 때문이다. 특히 최근 들어 나의 진가가 더 드러났다. 농산물 가격이 폭등한 데도 그 이유가 있다. 오죽했으면, 그 흔한 사과를 금사과라고 할까. 어차피 껍질을 벗겨 먹을 건데, 하자가 있으면 어떠하랴! 그렇지 않아도 살기 팍팍한데, 값이 싸면 살림에 도움이 되는 것은 불문가지. 하여 지난해부터 B급 농산물이 많이 팔렸다. 나를 전문적으로 내다 파는 온라인 플랫폼까지 생겼다. 그리고 그 바람이 이제 수산물까지 불어 닥쳤다.
못난이 농산물 구독 서비스 플랫폼(어글리어스) ⓒ어글리어스 홈페이지
버릴 게 하나도 없다
‘못난이 수산물’도 가성비를 앞세워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어서다. 인어교주해적단은 다리가 잘린 냉동 꽃게, 막이 터진 명란 젓갈 등 B급 상품들을 최대 80%까지 할인해 파는 이벤트를 열었다. SSG닷컴도 ‘못난이 신선식품 기획전’을 개최하면서 B급 수산물을 판매했다. 기획전에서 선보인 못난이 수산물은 국내산 오징어 슬라이스와 아르헨티나산 붉은 새우살 두 가지다. 잡은 과정에서 갈고리 자국이 생기거나 새우 껍질을 벗기는 가공 과정에서 흠집이 난 상품을 한데 모아 정상가보다 30∼40% 가량 싸게 팔았다. 대놓고 못생긴 농수산물만 파는 브랜드도 나왔다. 상품 판매 온라인 플랫폼 11번가의 ‘어글리 러블리’다. 2022년에 등장한 이 브랜드는 농협과 협업을 통해 못난이 농산물을 집중적으로 팔면서 갈치, 고등어 등 크기가 작거나 비늘이 벗겨지는 등 외형에 문제가 있는 B급 생선들과 B급 생선들로 만든 밀키트를 판매한다.1)
1) 뉴스 1 기사 보도자료 참고하여 재작성
못난이 수산물 플랫폼 기업 일본 피슬레 홈페이지 ⓒ피슬레 홈페이지
밀키트로 승부를 걸다
일본에서는 못난이 수산물로 밀키트를 만들어 성공 가도를 달리는 기업이 등장했다. 일본 후쿠오카에서 2022년 6월에 이구치 고시 대표가 창업한 피슬레(fishlle)다. 이 회사는 일본 연안에서 잡히는 못난이 수산물(일본에서는 미 이용어<未利用魚, monaitai 등으로 부름>)을 밀키트로 개발해 온라인 플랫폼(www.fishlle.com)을 통해 판매한다. 비즈니스 모델은 월 1회씩 제공되는 밀키트 구독 서비스가 핵심이다. 본래 이구치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2018년부터 벤너스라는 회사를 운영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대를 물려가면서 사는 후쿠오카 시가 섬에서 어획한 못난이 생선을 소비자(기업)에게 직송하여 파는 B2B 회사였다. 문제는 2019년 10월부터 시작한 이 사업이 반년도 되지 않아 커다란 난관에 봉착했다는 점이다. 코로나가 일본 전역에 확산되면서 그 동안 개척했던 외식업체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으면서 판매량이 뚝 떨어졌다.
피슬레에서 개발한 못난이 수산물 밀키트 ⓒ피슬레 홈페이지
생각을 바꾸면 통한다
궁하면 통하는 법. 그는 외식산업에서는 당분간 매출을 일으키는 게 힘들다는 판단이 들자 일반 가정으로 타깃을 바꿨다. 생선을 먹고 싶지만, 생선을 손질할 시간도, 기술도 없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맛이 풍부한 반조리 밀키트를 판매하면 승산이 있다는 확신이 섰다. 그리고 이 같은 승부수가 시장에서 통했다. 2020년 6월에 못난이 생선으로 만든 냉동 밀키트 팩을 클라우드 펀딩에 올렸다. 3개월 만에 400명 이상이 밀키트를 구입했다. 신상(新商品)에 대한 소비자의 열띤 반응은 물론 400만엔 가량의 매출 실적도 올렸다. 쾌조의 스타트였던 셈이다. 이 같은 시장 테스트를 거쳐 2021년 6월에 브랜드를 리뉴얼하고, 피슬레를 정식으로 론칭했다. 2023년 기준으로 밀키트 정기구독 서비스 등록자가 1만 명을 넘었다. 월간 판매액은 5000만엔 가량, 지금까지 개발한 밀키트 레시피는 30종이다. 피슬레가 지금까지 활용한 못난이 수산물은 모두 131톤이다. 이 회사가 없었다면, 모두 그냥 버려졌을 생선들이다. 못생겼다고 홀대할 게 아니다. 다 제 몫을 한다.
피슬레 정기 구독 서비스 요금 ⓒ피슬레 홈페이지 (2024년 1월 기준)
최재선
(주)에코트라 오션 랩
연구개발본부장, 법학박사
해양 전문지 『디 오션』, 『오션 테크』, 『환동해 경제학』 등을 공동기획하고, 같이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