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도시 역사를 기억하는 도시, 리스본: 과거에서 미래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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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글레이저의 저서 『도시의 승리(Triumph of the City)』는 "도시화는 번영과 행복의 열쇠다"라고 언급하며, 아테네부터 뉴욕에 이르기까지 많은 도시들이 도시화를 통해 번영하고 시민들의 행복을 이끌어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도시들은 역사를 기반으로 혁신을 추구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가도 재기하는 수많은 도시들 덕분에 도시의 승리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 원동력은 바로 과거, 즉 역사를 잊지 않고 되살리며 새로운 길을 찾아 도시의 부흥을 이루어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리스본은 바로 이러한 도시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외세의 침탈과 대지진의 폐허 속에서도 글로벌 해양도시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도시입니다.
포르투갈의 수도이자 항만도시인 리스본은 포르투갈 서부 테주강 삼각 하구에 위치하며, 광역 도시권 인구는 약 290만 명에 달합니다. 지명의 유래가 "안전한 항만"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이슬람 지배, 바이킹 침략, 십자군 전쟁 등 수많은 침략과 전투를 겪어야 했던 곳입니다. 그러나 9세기부터 12세기까지 이어진 레콩키스타(Reconquista)1) 를 거쳐, 15세기부터 17세기에 걸친 대항해시대에는 세계 최고의 부유한 도시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기독교 왕국들의 이슬람 세력 축출 및 영토 회복 과정(출처: 위키백과사전)
리스본이 대항해시대의 중심 도시가 될 수 있었던 지리적 이유는 이베리아 반도의 중간에 위치한 입지 덕분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지중해와 북해를 중심으로 교역했던 반면, 리스본은 무역의 주축에서 벗어난 외곽 지역이었지만, 오히려 향신료 무역을 위해 인도양과 태평양으로 나아가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리스본은 이러한 지정학적 입지를 활용하여 15세기 초부터 해양 탐험과 식민지 확장을 통해 세계 무역과 문화 교류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특히 포르투갈 엔히크 왕자의 주도 하에 아프리카 남단 탐험(1434년)과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1498년)은 포르투갈이 유럽 해상 패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리스본의 번영은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 다른 해상 국가들에 밀려 점차 약화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지속적인 개혁이나 혁신을 통한 경제 발전 대신, 브라질, 인도네시아 등 식민지에서 착취한 자원들을 소비하는 경제 구조로 인해 대항해시대의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리스본은 1755년 리스본 대지진과 그로 인한 화재, 해일로 인해 시가지의 2/3가 파괴되었으며, 이로 인해 대항해시대에 만들어진 역사적인 건축물이 많이 소실되었습니다. 대지진 이전에는 다른 유럽의 중세 도시들처럼 크고 작은 골목들이 조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진으로 인해 오늘날의 격자 형태의 도로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본이 역사적인 해양도시이자 글로벌 해양도시로 남아있는 이유는 도시의 역사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중세부터 현재까지 이어왔기 때문입니다. 리스본에는 고대 도시의 흔적이 남아있는 바이후 알투 지구, 근대 도시 역사가 남아있는 바이샤 지구, 그리고 신도시인 알마다 지구까지 각기 다른 역사가 동시대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리스본 바이후 일투 지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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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바이샤지구 전경
ⓒcheznunez.com(검색일: 2025.8.18.)
리스본의 타구스 강을 가로질러 리스본과 알마다를 연결하는 4월25일 다리
ⓒfreepik
리스본의 건축물들은 15~16세기 유럽 도시들에게 퍼져나간 고딕 양식을 잘 발전시킨 곳입니다. 특히 이 도시의 특징은 단순한 고딕 양식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대항해시대 정신을 고딕 양식과 함께 녹여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리스본에는 고딕 양식의 일종인 마누엘 양식 건물이 즐비한데, 이 건물의 구조물이나 장식은 배, 선박 용품, 항해 용품 등이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단순한 고딕 양식이라 부르지 않고 마누엘 양식이라고 별도로 칭하는 것입니다.
또한, 리스본은 모자이크 도로로도 유명합니다. 과거 로마 시대의 영향을 받아 유럽 전역에 모자이크 형태의 도로와 건물 외양이 있었지만, 현재는 리스본과 포르투갈 일부 지역만 남아있습니다. 리스본 광장이나 주택가 입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모자이크 양식은 로마 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에 대항해시대의 흔적을 담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리스본은 외세의 침탈이나 대지진이라는 자연재해에도 불구하고 중세, 근대, 그리고 현시대를 아우르는 역사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결국, 리스본의 역사는 번영과 행복의 열쇠가 되어 현재 리스본이 세계 관광과 물류의 중심지로 남아있을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리스본 모자이크 도로
ⓒ클립아트코리아
오래전부터 해양수도를 꿈꿔온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부산은 경제, 사회, 정치 측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항이 개항한 이래, 일제강점기에는 북항 지역 항만으로 개발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국가 경제 발전의 물류 거점으로 크게 기여했습니다. 부산항 개항 150년이 흘러가고 있는 지금, 안타깝게도 부산에서는 150년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현재의 부산항과 과거 부산항을 없애고 만들어지는 북항재개발 지역만이 남아있습니다.
과거 이탈리아 지인과 부산을 방문했을 때, 그가 부산을 "모던하다"고만 표현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그 뜻은 "역사가 없는 도시"라는 의미였습니다. 리스본처럼 수백 년의 역사를 지켜 도시에 흔적을 남기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부산의 소중한 150년 개항과 근대화 역사를 조금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을까요? 과거 물류창고와 항만 관련 시설들은 거의 철거되고 아파트와 오피스텔이 들어섰으며, 신규 개발되는 북항지역에는 서양 스타일의 오페라 하우스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바다를 상징하는 진주를 품은 조개 모양이라 자랑하지만, 어디를 봐도 부산의 역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도시의 승리는 역사를 잊지 않고 그 기반 위에서 혁신과 창조를 통해 진화해 왔습니다. 부산이 진정한 해양수도이자 글로벌 항만도시로 성장하고자 한다면, 부산의 역사를 간직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부산 원도심에 남아있는 역사적 공간과 건물, 그리고 북항지구의 현대적 공간과 건물을 리스본처럼 시대별 공간을 유연하고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부산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리스본이 보여주듯, 도시는 역사를 통해 생명력을 얻고 미래를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 도시들도 과거를 소중히 여기고 그 위에 새로운 가치를 더할 때, 진정한 번영과 행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성우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물류·해사산업연구본부 선임연구위원
포용과 통섭의 공간이 바다인 것처럼, 해양물류는 전체 물류산업을 연결하고 융합하는 산업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양도시의 물류 및 경제산업에 관한 전문위원으로 활발히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