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도시 트롬쇠, 북극을 품은 도시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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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롬쇠는 연구의 도시를 넘어, 누구나 북극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체험 인프라를 구축했다. 또한 북극이사회와 북극경제이사회 등 국제 거버넌스의 무대를 품으며, 정책·과학·경제가 교차하는 글로벌 북극 허브로 자리매김했다.
이번 편에서는 트롬쇠가 어떻게 ‘북극을 품은 도시’를 넘어 ‘북극을 이끄는 도시’로 발전했는지, 그리고 그 성공이 한국과 부산에 어떤 시사점을 던지는지 살펴본다.
북극 체험의 중심지
트롬쇠는 연구뿐만 아니라 북극에 가지 않고도 북극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인프라를 마련하고 있다. 1998년 설립된 폴라리아는 파노라마 영화관, 수족관, 전시관을 갖춘 북극 해양 생물 박물관이다. 바다표범과 같은 북극 해양 동물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으며, 다양한 전시물과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북극 생태계를 학습할 수 있다. 특히 디지털 기반의 전시 체험 인프라를 갖추고 있어 첨단 기술을 활용한 극지 교육 프로그램의 모델이 되고 있다.
1978년 설립된 트롬쇠 극지방 박물관은 극지 탐험의 역사와 문화, 자연환경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극지 탐험가들의 유물, 북극 원주민 생활 도구, 극지 동식물 표본 등을 전시하며, 북극 탐험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전달한다. 박물관 인근에는 다년간 물개잡이에 사용된 퇴역선을 전시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북극 인프라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있다.
트롬쇠는 백야(5월 중순~7월 중순)와 극야(11월~1월 중순)를 약 두 달씩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겨울철 오로라 관측지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매년 6월에는 백야 마라톤을, 1월에는 북극야 하프 마라톤을 개최한다. 스톨스티넨 전망대에서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트롬쇠 시내와 주변 피오르드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빙하에 의해 형성된 U자형 계곡이 바다와 만나 만들어진 피오르드는 트롬쇠만의 독특한 해안 지형으로, 기후변화의 영향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폴라리아 전경
©장하용, 촬영일 : 2022.9.2.

트롬쇠 극지방 박물관 전경
©장하용, 촬영일 : 2024.9.6.

트롬쇠 극지방 박물관 내부전시물
©장하용, 촬영일 : 2024.9.6.

트롬쇠 피오르드 전경
©장하용, 촬영일 : 2024.9.6.
북극 거버넌스의 중심
트롬쇠는 북극 거버넌스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1996년 오타와 선언을 통해 설립된 북극이사회의 사무국이 프람센터 내에 위치해 있다. 북극이사회는 북극권 8개국(미국, 캐나다, 러시아,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아이슬란드)과 북극 원주민을 대표하는 6개 단체, 그리고 한국을 포함한 13개 옵서버 국가들이 참여하는 북극 지역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환경 보호를 위한 주요 협력체다.
2014년 설립된 북극경제이사회 또한 트롬쇠에서 활발히 활동한다. 북극권 8개국의 기업 대표들로 구성된 이 조직은 북극 지역의 책임 있는 경제 개발을 촉진하고 기업 간 협력을 증진한다. 2022~2025년 전략계획에 따르면, 북극경제이사회는 '북극을 비즈니스 친화적인 환경으로 조성'하겠다는 비전 아래, 국제 가치 사슬의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북극 내 강력한 시장 연결 육성, 인프라 투자를 위한 공공-민간 파트너십 장려,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규제 프레임워크 홍보, 산업과 학계 간 지식 및 데이터 교환 촉진, 전통적인 토착 지식과 중소 비즈니스 수용 등 5대 주요 테마를 추진하고 있다.
매년 1월 중·하순 트롬쇠에서는 '북극 프런티어(Arctic Frontiers)' 컨퍼런스가 4일간 개최된다. 노르웨이가 북극 정책과 과학의 글로벌 리더십을 선도하기 위해 시작한 이 행사에는 한국을 포함해 50개국 이상의 정부 정책결정자, 산업계, 연구소, 대학 등 3,000여 명의 전문가와 학생, 북극 원주민이 참가하여 발표 및 토론을 갖는다. 트롬쇠가 단순한 연구 도시를 넘어 북극 정책과 경제, 과학이 교차하는 국제 협력의 허브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북극이사회 간담회
©출처: 장하용, 촬영일 : 2024.9.6.
성공의 비밀
전문가들은 트롬쇠가 북극 연구와 산업의 세계적 중심지로 성장한 이유를 몇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지리적 이점이다. 북위 69도에 위치한 트롬쇠는 북극권에 속하면서도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위도에 비해 온화한 기후를 갖고 있다. 1월 평균 기온이 약 영하 5~8도로, 북극권 도시로서는 매우 따뜻한 편이다. 또한 연중 운항이 가능한 부동항을 보유하고 있어 북극 탐험과 연구의 전진기지로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둘째, 통합적 연구 생태계다. 프람센터를 중심으로 20개 이상의 연구기관이 한 곳에 모여 있어 학제 간 협력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노르웨이 극지연구소는 23개국 17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탁월한 성과를 내는 과학자라면 국적 불문하고 채용한다. 연구소 부소장급에 해당하는 연구부장직을 터키 국적 과학자가 맡고 있을 정도다.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연구 환경이 우수 인력을 끌어들이는 핵심 경쟁력이다.
셋째, 인재 양성 시스템이다. 트롬쇠 대학교는 3개 대학과 협정을 맺어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배출한다. 박사과정이나 박사후 과정 연구원에게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의 적정한 급여를 제공하며, 자녀 양육이나 주택 구입 등에 대한 세제 혜택도 제공한다.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넷째, 산업 생태계와의 연계다. 트롬쇠항을 중심으로 160개 이상의 기업이 입주해 있으며, 어업·크루즈·에너지·물류 등 다양한 산업이 연구기관과 긴밀히 협력한다. 연구 성과가 산업으로 연결되고, 산업 현장의 수요가 연구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다섯째, 정부의 지속적인 투자다. 노르웨이 정부는 극지 연구를 국가 전략 과제로 설정하고 꾸준히 투자해왔다. 프람센터 건립, 쇄빙연구선 건조, 연구 프로그램 지원 등에 막대한 예산을 배정한다. 석유와 천연가스로 축적한 국부 펀드(한화 약 1,500조 원 규모)의 일부를 미래 먹거리인 북극 연구에 투입하는 것이다.

프람센터 입주기관 현황
©장하용, 촬영일 : 2024.9.5.
미래를 향한 도전
트롬쇠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2026년 '유럽 청년 수도(European Youth Capital)'로 선정되어 청년 교류와 협력을 강화할 예정이다. 트롬쇠 청년의회는 북극권 도시 청소년 간의 활동 및 교류 협력 방안을 모색하며, 차세대 북극 리더를 양성하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도 트롬쇠의 주요 과제다. 북극의 기온은 지구 평균보다 2배 이상 빠르게 상승하고 있으며, 해빙 면적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프람센터 연구진은 북극 환경 모니터링, 기후변화 예측, 생태계 영향 평가 등을 통해 기후 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북극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전 지구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트롬쇠의 연구는 인류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
지속 가능한 북극 개발도 중요한 이슈다. 북극경제이사회는 환경 친화적 북극 개발을 위한 기술 협력, 북극 원주민 경제와의 상생 협력, 책임 있는 자원 개발 등을 논의한다. 트롬쇠는 경제 개발과 환경 보호의 균형을 찾는 북극 거버넌스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북극경제이사회 간담회
©장하용, 촬영일 : 2024.9.6.
북극항로의 미래, 우리의 미래
트롬쇠는 200년 가까이 북극의 관문으로서 역할을 해왔다. 1928년 극지연구소 설립 이후 한 세기 가까이 북극 연구를 선도했다. 남들보다 일찍 북극의 가치를 알아보고, 지속적으로 투자하며, 국제 협력의 플랫폼을 구축했다. 그 결과 인구 7만의 작은 도시가 북극 시대의 글로벌 허브로 성장했다.
트롬쇠의 성공은 혁신과 협력, 그리고 미래를 향한 투자에서 비롯됐다. 프람센터라는 통합 연구 공간, 개방적인 국제 협력, 산학연 연계 생태계, 청년 인재 양성, 지속 가능한 발전 전략 등이 시너지를 일으켰다. 북극이사회와 북극경제이사회라는 거버넌스 기구를 유치하며 북극 정책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대한민국, 그리고 부산이 트롬쇠에서 배울 점은 명확하다. 북극은 더 이상 먼 곳이 아니다. 기후변화, 북극항로, 자원 개발, 수산업 등 북극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우리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 트롬쇠가 200년 가까이 북극을 준비해온 것처럼, 우리도 지금부터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부산은 자타가 공인하는 글로벌해양허브도시이다. 세계적인 항만과 조선·해양 산업을 보유하고 있다. 트롬쇠와 협력을 강화하고, 극지 연구 인프라를 구축하며, 차세대 쇄빙연구선의 모항을 유치한다면, 부산은 동북아 북극항로의 관문이자 극지 연구의 허브로 성장할 수 있다. 트롬쇠가 북극을 품은 도시로 성장한 것처럼, 부산도 북극항로를 품은 해양수도로 발돋움할 수 있는 것이다.
글로벌 북극항로 관문도시의 꿈을 다시 축적시켜야 한다. 그 꿈은 단순히 인프라를 짓는 것이 아니라, 북극항로 시대를 선도하는 연구와 산업, 인재와 협력의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트롬쇠가 보여준 것처럼, 북극분야에 특화된 도시, 개방적이고 혁신적인 도시, 미래를 준비하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 북극의 미래는 곧 우리의 미래다. 그 미래를 부산에서, 대한민국에서 만들어가야 한다.

트롬쇠에서 필자가 만난 오로라
©장하용, 촬영일 : 2024.9.5.


장하용
부산연구원 미래전략기획실장
책임연구위원
공학박사
해양정책의 방향은 변화의 흐름 속에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해양정책·국가 전략 수립 및 미래 해양도시비전 연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