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산업 제분소의 변신, 미슐랭 3스타 해산물 미식 레스토랑 - 아포니엔테(Aponie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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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니엔테 홈페이지 초기 화면
ⒸAponiente.com
200년 된 제분소의 변신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대서양 연안. 하루에 바닷물이 두 번 드나드는, 엘 푸에르토 데 산타마리아(El Puerto de Santa María)에 1815년 즈음 조수(潮水) 제분소가 들어섰다. 만조 때 해수를 들여보냈다가 썰물 때 맷돌을 돌려 밀가루를 빻는 혁신적인 시설이었다. 당시 카디즈 만은 아메리카 대륙과 교역이 늘어나면서 호황을 구가했다.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도시는 팽창했다. 인력이나 가축으로 움직이던 기존의 제분소로 밀가루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바닷물 제분소가 들어서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간척지가 만들어지고, 밀 생산량이 늘어났다. 제분 비용이 내려가면서 덩달아 빵 가격도 떨어졌다. 일자리가 새로 만들어졌고, 상품 수송이 늘어나자 부두 같은 물류 인프라도 속속 들어섰다. 지역 주민의 생활은 더욱 윤택해졌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문제는 산업혁명이었다. 증기 기관이 도입되고, 산업 구조가 급격하게 변했다. 산업혁명 전에 바닷물을 이용한 친환경 제분소는 쓸모가 없어졌다. 넓디넓은 시설은 공구 창고나 작업장 등으로 전락했고, 결국엔 방치됐다. 처음엔 화려하게 등장했으나 결과는 쓸쓸한 퇴장이었다.

레스토랑 아포니엔테 외부 모습
Ⓒ타임지
바다의 요리사, 앙헬 레온
밀 제분소를 다시 살린 것은 ‘바다의 셰프’, 앙헬 레온(Ángel León)이다. 그는 2015년에 지금까지 다른 곳에서 운영하던 레스토랑(아포니엔테, Aponiente1)
)을 옮길 장소를 물색하다가 이곳을 발견했다. 밀 제분소를 리모델링하면서 건물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고, 내부를 재해석했다. 돌기둥과 아치형 천장은 그대로 두고, 제분소의 저장공간은 와인 셀러와 해산물 숙성실로 바꿨다. 굴 껍질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건물 외벽에는 유리창을 크게 냈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수로를 볼 수 있도록 개방감을 높였다. 주방은 오픈 형으로 설계하여 건물 중앙에 배치하고, 트렌디한 감각을 한껏 살렸다. 식사 테이블도 넓게 띄어 놓아 완벽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바깥에서 보면, 박공 지붕으로 길쭉하게 지어진 밀 제분소가 200년 만에 바다 요리를 만드는 미식 공간으로 감쪽같이 변신했다. 앙헬 레온은 스러져가는 해양문화유산을 살리면서 자신이 원하는 ‘바다요리 창작 실험실’을 만든 셈이다.
1) Aponiente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 특히 카디스(Cádiz) 해안에서 사용되는 옛 스페인어(안달루시아 방언)으로,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의미. 앙헬 레온은 이를 음식점 이름으로 사용하면서 ‘바다의 숨결이 스며드는 공간’으로 해석하고, 바다에서 영감을 받은 요리, 해풍·조류·조수·플랑크톤 등 바다 생태계의 에너지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했다고 밝혔음, 그는 아포니엔테를 2007년에 처음 오픈했는데, 이곳에서는 지금도 저렴한 가격대의 음식을 팔고 있음
그는 1977년에 안달루시아 카디즈 만에서 태어났다. 올해 나이 48세, 아들 하나를 뒀다. 지난해 넷플릭스에 올라온 ‘세프의 테이블’을 보면, 그는 어린 시절 주말마다 아버지가 끄는 어선을 타고 나가 바다를 배운 것으로 나온다. 이때 해양 생물에 대한 이해도 높인 것으로 알려졌다. 젊은 시절 한동안 그를 괴롭혔던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장애(ADHD)도 바다를 통해 치유했다고 고백했다. 그가 바다 세프가 된 사연이다.

바다의 요리사, 앙헬 레온
Ⓒ타임지 및 https://canalcocina.es/

Ⓒ https://www.tastingtable.com 및 Aponiente.com
세상에 없던 해산물 요리
앙헬 레온은 스페인에서 매우 유명한 세비야 요리학교를 졸업하면서 본격적으로 세프의 길로 접어들었다. 다만 그는 조금 색다른 길로 갔다. 전통 레시피로 음식을 만드는 데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대신 해양 미생물과 미세조류를 연구하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이용하지 않았거나 버려지던 생선과 해산물을 식재료로 활용했다. 그가 운영하는 식당에는 그 흔한 스페인 음식 파에야나 하몽 등이 보이지 않는다. 바스크 지방의 소울 푸드라는 염장 대구 요리, 빠갈라우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실험실 요리만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플랑크톤 베이스의 잘피 리소토’, ‘참치로 만든 바다 하몽(Jamón del Mar)’, ‘물고기 단백질 소시지’, ‘바다에서 나온 짭짤한 꿀(Miel de Mar)’ 등이다. 식단도 전채 요리와 와인이 들어 있는 테이스팅 메뉴(20가지 음식) 한 가지다. 쉽게 말하면, ‘스페인식 오마까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음식 가격은 얼마일까? 우리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2025년 기준 1인당 가격이 310유로(한화 약 40만 원)다. 이 지역 특산주인 셰리(Sherry) 와인을 페어링 옵션으로 추가하면 420유로에 이른다. 그럼에도 전 세계 미식가들이 밀려온다. 6개월 이상 예약 대기는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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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oniente.com(아래 그림은 잘피(ellgrass.zostera))를 재배하여 만든 바다 씨리얼(쌀)
카디즈만 연안 공동체 복원
아포니엔테 메뉴는 해마다 바뀐다. 서빙되는 음식은 전채부터 디저트까지 모두 바다에서 나온 식재료로 만든다. 생선을 다듬을 때 나오는 부산물조차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생선 비늘은 젤라틴으로 변하고, 가시(뼈)는 콜라겐 파우더로, 껍질은 바삭바식한 크리스프로 재탄생한다. 또한 ‘잘피(zostera marina)’를 재배하여 세계 최초로 바다 시리얼(Cereal Marino)도 개발했다. 주방은 음식 폐기물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앙헬 레온이 이끄는 레스토랑 아포니엔테의 진정한 혁신은 어쩌면 ‘지역 재생’에 있다. 식당이 있는 카디스 만은 한때 유럽에서 소금이 가장 많이 생산됐던 곳이었다. 19세기 이후 산업 쇠퇴로 염전과 어장이 폐허가 되었다. 그는 버려진 염전을 복원해 해양 생물 300여 종이 돌아오게 했고, 지역 어업인을 고용해 친환경 양식과 식재료 공급망을 구축했다. 바다, 지역, 경제가 결합된 순환 생태 모델을 실현하면서 지역의 실업률을 낮추고, 카디스 만을 ‘블루푸드 밸리’로 재탄생시켰다.
그에게 레스토랑은 단순히 음식을 만들어 파는 비즈니스 공간이 아니다. 지역 공동체를 복원하고, 함께 사는 생활 플랫폼이다. 참고로 아포니엔테는 2010년에 미슐랭 1스타, 2014년에 2스타, 2017년에 3스타를 차례로 획득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특히 2019년에 스페인에서는 최초로 미슐랭 그린스타(지속가능성 상)를 수상했다. “바다에는 버려지는 것이 없다(no se tira nada del mar)”는 앙헬 레온의 음식 철학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최재선
한국연안협회 연구위원, 법학박사
해양 전문지 『디 오션』, 『오션 테크』, 『환동해 경제학』 등을 공동기획하고, 같이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