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화 100년 전 부산 바다의 경계가 달라졌다- 중구와 동구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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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시기 중구와 동구지역 해안선 변화
해안지역에서 살아온 어촌 주민들은 해안에 정박한 배를 큰 파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방파제를 조성하여 어업에 종사하여 왔다. 부산이란 지역이 도시가 되기까지는 오랜 향촌사회였던 동래 지역이 아닌, 현재의 범일동 부산진성 앞에 위치한 ‘부산포’라는 작은 어촌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변방의 어촌이었던 부산포에는 조선 건국 15년 뒤인 1407년, 진해 제포와 함께 왜인(倭人)들과의 교역과 외교를 위한 공간인 ‘부산포왜관(富山浦倭館)’이 설치되었다. 이후 이곳에는 일본 교역선과 교사절단이 타고온 선박을 위한 방파제와 계류장을 설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인 1614년 순찰사 권반(權盼)이 이곳 선착장의 부실함을 개선하기 위해 부산진성 서문 앞 해안을 굴착하여 선박이 안전하게 계류할 수 있는 선착장을 조성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굴강(堀江)이라 불리는 구조물을 조성하여 선박의 건조나 수리 또는 정박하는 시설로 활용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현 수영동 지역에 경상좌도 수군절 도사영(이하 좌수영성)이 설치될 때도, 좌수영성이 1635년부터 1652년 감만포로 이전했을 때도 군선을 계류할 수 있는 선착장을 조성했다.
범일동에서 출발한 부산포왜관이 1607년 동구 수정동 두모포왜관으로 이전했을 때에도 일종의 굴강 형태로 선박 계류장을 조성하거나 태풍 등으로부터 선박을 보호하는 방조(防潮)와 방파(防波)를 겸한 대형 방파제를 조성한 예는 있지만, 오늘날의 부두처럼 선박을 계류하기 위한 바다를 대규모로 매축하여 조성한 예는 대부분 근대 개항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조선 초인 1407년부터 조선후기까지, 왜관이라는 특정 공간을 유지하고 있었던 부산은, 굴강 형식의 선착장이 아닌 해안을 어느 정도 매축하여 별도의 선착장을 조성한 예가 초량왜관 시기(1678~1872년)에 포착되었다.
[그림 1]의 「초량화관도」에는 초량왜관의 선류장이 묘사되어 있다. 이 선류장의 경우 기존의 굴강 형태가 아닌 마치 한자 요(凹)자를 거꾸로 한 형태와 같은 선류장을 조성하고 바다 바깥쪽에 마치 집게발과 같은 형태로 방파제를 조성한 부두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이는 바다 위에 선박 계류가 가능한 수심까지 다소 넓은 폭의 방죽을 길게 쌓고 마치 한자 요(凹)자처럼 부두를 축조하여 선박 계류장을 조성한 것이다.

[그림 1] 일본 쓰시마현립박물관 소장 「부산 초량 화관도」에 나타난 초량왜관 시절 선창의 凹자형 선류장과 집게발 형태의 방파제 모습
Ⓒ일본 쓰시마현립박물관 소장 ‘초량화관도 부분
이후 오늘날 부두 개념으로 바다를 매축하여 선류장을 조성한 것은 근대 개항 후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먼저 부산에서 시작되었다. 근대 첫 개항 도시가 된 부산의 경우 개항 후 2년 만인 1878년 7월(또는 11월) 지금의 수정동인 두모포에 해관(오늘날 세관)을 설치하였다. 이 당시에도 해안에 일종의 굴강 형태로 조성한 곳에 선박을 계류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일본의 무력적 항의에 굴복하여 3개월이 채 되지 않아 두모포해관이 문을 닫았다. 두모포해관이 폐쇄된 후 1883년 10월, 현재 중구 동광동 부산데파트 뒷편에 부산해관이 정식으로 개청했다.

[사진 1] 해관창고가 보이지 않는 1885년 부산항 모습
Ⓒ부산세관박물관
1) 1887~1888년 시행한 ‘부산해관매축공사’
근대 개항 이후, 조선 후기 초량왜관 일대는 부산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지정되었다. 이에 따라, 거류지 인근에 위치한 초량왜관 시기 선류장을 중심으로 교역장이 형성되었다. 부산해관이 개청되면서, 기존의 협소한 물량장을 확장하고, 해관보세창고 건립 및 선류장 시설 개축 등을 위한 별도 부지 조성이 필요해졌다. 이를 위해 부산해관은 한국정부로부터 공사비를 하부(下附)받아 처음으로 1887~88년 현 중구 부산데파트 일대를 매축했다. 이 매축공사는 1888년 4월에 준공되었고, 이어 1889년 10월 해관 잔교와 보세창고 건립되었다. 이 일련의 공사는‘ 부산해관매축공사’로 명명되었다.

[사진 2] 해관창고가 보는 1889년 부산항 모습
(분홍색 화살표 아래 해관창고가 보인다)
Ⓒ부산세관박물관

[사진 3]‘부산북빈매축공사’시행전 1889경 부산항 모습
(오른쪽 위에 가로선처럼 하얗게 보이는 부분이 현 대청로에서 동광동행정복지센터로 이어지는 옛 영선고갯길이다.
지금의 40계단 주변이 복병산 동쪽 자락이 해안에 급한 경사를 이루며 흘러내린 모습을 볼 수 있다.
Ⓒ김한근 소장
2) 1902~1909년 시행한 ‘부산북빈매축공사’
‘부산해관매축공사’ 이후, 부산의 일본인 사회는 그들의 전관거류지 영역 확대 뿐 아니라 일본과의 교역량이 점차 늘어날 것에 대한 대비를 위해 부두시설 확충에 나섰다. 이에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부산매축주식회사(釜山埋築株式會社)를 설립하여 1898년 1월 구한국정부에 매축 허가를 요청하였다.
1900년 12월 8일, 부산 북항지역 일부에 대한 매축 허가를 받았다. 매축범위는 오늘의 중앙동 일대, 즉 오늘날의 부산역, 부산우편국과 세관부지 등 중앙동의 중앙로 일대였다.
이 공사는 1, 2기 공사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1기 공사는 1902년 7월 19일에 착공하여 1905년 12월 준공을 보았고,
2기 공사는 1907년 4월에서 1909년 8월까지 실시했다.
당시 공사에 필요한 재료 및 기구 일체는 조선국정부로부터 무관세의 특전을 받았다. 또 절영도의 토사, 석재 및 동광동 복병산 자락의 옛 일본거류지 묘지 자리의 토석을 아무런 대가없이 채취할 특권도 얻었다. 제 1·2기 공사에서 매축하여 얻은 토지는 1,374여평이었다. 이 공사는‘ 부산북빈매축공사(釜山北濱埋築工事)’로 명명 되었다.

[그림 2] 1903년 발행「부산항시가 및 부근지도」에 나타난‘부산세관설비공사’부분
(지도의 가운데에서 왼쪽 해안에 ‘부산북빈매축공사’ 예정지가 점선으로 표기되어 있다)
Ⓒ김한근 소장
3) 1906~1912년 시행한 ‘부산세관설비 및 어항정비공사’
1905년 12월, ‘부산북빈매축 제1기 공사’ 가 준동된 후, 제2기 공사를 준비하던 과정에서 1906년 부산세관 설비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는 1889년 ‘부산해관매축공사’ 완공 당시 3천 명이 채 안되던 부산 내 일본인 수가, 1905년에는 1만3천여 명으로 급격히 증가하고, 교역량과 선박 규모 역시 대형화 되면서 기존 세관 설비로는 대응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비록 1905년 ‘부산북빈매축 제1기 공사’로 대형선박 접안 시설은 확보되었지만 통관 수속 등을 처리하는데 기존의 해관(세관) 설비로는 매우 부족한 상태였다. 이에 보다 큰 규모의 세관설비와 더불어 1905년 개통한 경부선 기·종점역이었던 협소한 초량역 대신 일본인 전관거류지 가까이로 부산역 이전의 필요성도 있었다. 게다가 1905년 9월부터 운항을 시작한 관부연락선 전용부두도 필요했다.
이에 1906년 7월 1일‘ 부산세관설비 및 어항정비공사’를 기공하여 지금의 중앙동 부산경남본부세관 부지와 현 중앙동 부산무역회관 부지 일대에 대한 매축공사를 실시했다. 이 공사는 대부분은 1910년까지 준공하였는데 그 중 일부분은 1912년 3월 31일에 완공되었다. 이 때 매축한 해면은 10,400여평에 이르며, 매축지의 일부는 해안에서 약 36m 길이의 돌출된 부두로 조성했는데 이 돌출된 부두 남측에 폭 24m 연장304m의 철도잔교를 가설하였다. 이 철도잔교에는 3천~4천톤의 기선이 정박할 수 있도록 설비함으로써 이후 관부연락선 전용부두가 된 지금의 제1부두이다. 육상 부분에는 매축지에 도로를 사이에 두고 부산역, 건너편에 세관청사 및 부속건물을 신축하고 세관 인근에 부산우편국도 신축했다.
한편‘ 부산세관설비 및 어항정비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부산북빈매축 제2기 공사’가 계획되면서 1906년 부산잔교회사가 설립되어 북빈매축지의 남쪽 끝에서 돌출토록한 폭 11m, 길이 200m의 철도잔교를 가설하였다. 이 잔교부두는 임시 관부연락선 부두로 이용되었다.
이렇게 1902년부터 시작하여 1912년 완공한‘ 부산북빈매축공사’와 ‘부산세관설비 및 어항정비공사’를 통해 일본거류지를 보다 넓게 보완되었을 뿐 아니라 부산에 있어서의 일제 근거지를 보다 강고히 해 준 사업으로 1910년 부산역, 부산세관, 부산우편국 근대 부산을 상징하는 주요 건축물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오늘날의 중앙동은 이때 바다가 메워져 오랫동안 부산항의 중심지구가 되었다. 이후 부산 시가도 항만을 따라 차츰 북쪽으로 발전의 열기가 이어지게 되었다.
이 공사와 동시에 수산물 수출입을 위한 어향 시설도 함께 정비되었다. 용미산(현 롯데백화점 광복점 부지에 있었던 해안으로 돌출된 작은 동산) 아래, 구 세관 구역과 선류장의 작은 면적을 개조하여 어항(漁港)으로써 필요한 설비공사도 실시했다. 약 6,000여평의 수면적(水面積)을 남겨놓아 어선의 정박지로 활용하도록 하면서 이곳 설비의 주위 연안은 경사진 돌담으로 하여 수산물의 하역을 보다 쉽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뿐만아니라 저수고(貯水庫), 냉장고(冷藏庫) 겸용의 건물과 제빙소도 건립하여 항상 선어(鮮魚)를 수급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산물의 경매장, 하역장, 소금저장고, 수산물염장고, 건어물 창고 등을 건립하여 수산물의 취급과 운반에 최대한 편리를 기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림 3] 1907년 발행「한국부산항시가명세도」에 나타난‘부산북빈매축공사’및‘부산세설비공사’부분
(1905년 완공된 ‘부산북빈 제1기매축공사’로 인해 매축된 부분과‘부산세관설비공사’가 진행 중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른쪽 가운데 아래에 해안으로 돌출된 잔교부두가 보인다. 잔교부두 아래에 별도 어항구역을 조성한 것도 나타난다)
Ⓒ김한근 소장

[사진 4]‘부산북빈매축공사’가 진행 중인 1907년경 모습
Ⓒ1926년 발행 『부산대관』수록사진
4) 1909~1912년 시행한 ‘쌍산착평공사’
‘부산북빈매축공사’진행 과정에 실시하여 1912년 완공한‘ 부산세관설비 및 어항정비공사’로 인해 부산항이 어느정도 정비가 되었지만, 당시 현 대청로에서 영주사거리에 이르는 구간에 해발 39미터의 영선산(營繕山)과 영국 영사관산(영국이 조차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
름)이 해안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이로인해 부산항이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 단절된 듯한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당시 현 중구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로서는 거류지에서 부산진 방향으로 이동하는 일이 매우 불편했다.
이에 따라, 두 산(쌍산 雙山)을 깎아 내려 평지를 조성하고 여기서 발생한 흙과 돌로 바다를 메우는 ‘쌍산착평공사(雙山鑿平工事)’를 계획했다. 이 공사는 1909년 5월 착공하여 1912년 8월, 북항지역 4만4천7백80평을 매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공사로 영선산과 영국 영사관산이 사라지고, 초량 앞바다와 제1부두 사이 매축지에 호안(護岸)의 돌벽[石垣]과 바다에서 짐을 부리는 물양장이 축조되었다.
쌍산착평공사가 마무리될 시점에‘ 부산세관설비 및 어항정비공사’로 건설된 제1잔교 부두(현 부산항 제1부두)까지 철도가 연결되고 이곳에 잔교역도 신설되었으며, 1912년 6월 15일부터 관부연락선도 이곳에 접안했다. 이로서 일본 후쿠오카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제1잔교부두(제1부드)에 내린 승객들이 잔교역에서 곧바로 경부선 열차를 탑승할 수 있었다.
이미 러일전쟁 당시 한창 가설공사가 진행중이던 경부선 철로를 이용하여 전쟁물자 수송에 큰 도움을 받았던 일본으로서는 부산항과 경부선 철도의 연계는 그들의 대륙 침략의 교두보를 부산에 형성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대륙침략의 또 하나의 관문인 신의주의 압록강 가교공사(鴨綠江 架橋工事, 1911년 완공)와 부산의 경부선 종점의 연장을 같은 시기에 획책한 일로서도 알 수 있다. 이로써 일본에서 오는 물자와 인력은 부산항에서 곧바로 중국대륙까지 나아가고 중국대륙의 물자와 인력은 바로 일본으로 수송하게 되었다.
지금의 경부선 종점인 부산역은 1910년 중앙동 현 무역회관 일대에 신축되었으나 1953년 발생한 소위 ‘역전대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에 임시 역사(驛舍)를 조성하여 운영하다 1969년 현 초량 부산역을 신축 이전했다. 한동안 중앙동 옛 부산역 일대를 사람들이 새마당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산을 깎아 바다를 메워 넓은 부지가 새로인 형성되었다는 것에서 이름한 것이었다.

[사진 5]1890년경 초량해안 모습
(원래 초량 해안은 하얀 모래가 드넓게 펼쳐진 백사장에 해안 방풍림이 가로로 늘어선 모습이어서
영주사거리에서 초량시장에 이르는 일대를 ‘사량리’, 초량 삼거리 일대는 자갈 해안으로 ‘기석빈’이라 불렀다.
Ⓒ김한근 소장

[사진 6]‘쌍산착평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며 초량 중국영사관 앞 바다 매축공사도 한창 진행 중이 던 1911년경 모습(사진엽서)
Ⓒ김한근 소장

[사진 7]‘쌍산착평공사’마무리 과정에서 나타난 중구와 동구 해안매축지 모습_ 『1915년 사진집』.
Ⓒ김한근 소장
5) 1911~1917년 시행한 ‘부산항 제1기 해륙연락설비공사’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10년 한일병탄 이후, 부산항을 대륙진출의 관문으로서 인식하고‘ 부산항 제1기 해륙연락설비공사’라는 명칭으로 제2부두 건설에 착수했다. 1911년도부터 4개년의 계속 사업으로 계획한 이 공사는 제2잔교부두 건설과 그에 따른 바다 매축·육상설비·창고 건설·항내 준설·방파제 축조 등이었다.
이 공사는 재정관계로 연기되어 마침내 1917년에 제2잔교가 완성되고 2년 뒤 잔교 육상설비공사가 완료되었다. 이 공사를 계기로 부산항은 만주벌판과 연계되는 관문 항구로서 발돋움하게되었다.

[그림 4] 1924년 발행「부산」지도에 나타난‘제1기 해륙연락설비공사’이후 제2잔교부두 모습
(아래쪽이 제1잔교부두, 위쪽이 제2잔교부두이다)
Ⓒ김한근 소장
6) 1913~1917년 시행한 ‘부산진 제1기 매축공사’
근대 개항 이후, 오늘날 광복동을 중심으로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었다. 이후 부산으로 이주해 정착하는 일본인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우선 이들의 생필품과 연관한 산업 생산시설을 위한 별도의 공업단지 조성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인들 거류지 맞은편에 위치한 영도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1900년을 전후하여 영도에 각종 공장 설비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당시 영도에는 조선철공업 외 장유 제조, 벽돌공장, 재제염공장 등이 설립되었고, 이후 봉래동, 대교동, 대평동, 남항동 등 평지를 중심으로 부산의 주요 공업단지가 형성했다. 그러나, 영도대교가 아직 개통되지 않았던 시기로, 도선이나 선박을 이용해 영도와 육지를 오가는 데 날씨가 좋지 않으면 큰 불편을 겪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부산항 부두 건설을 통해 수출입 물동량 처리는 원만했지만 영도 공업지역에서 생산된 각종 상품들의 뭍으로 운반하는데에 많은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공업시설이 날로 확대되고 그 규모도 점차 거대해져 갔다. 이에 수정동과 범일동 일대에 대한 매축을 통한 공업단지 건설을 계획했다. 마침내 1913년 수정동과 범일동 해안 매축을 위한 ‘부산진매축공사(釜山鎭埋築工事)’에 들어갔다.
부산진매축공사는 크게 1, 2, 3기로 나누어서 실시되었다. 제1기 매축은 1913년 6월부터 1917년까지, 2, 3기는 1926년부터 1932년 12월까지 진행했다. 부산항의 북부인 구관(舊館, 현 수정동)에서 범일동 부산진성(釜山鎭城) 앞에 이르는 40만평(실제 측량 때에는 558,150평이었음)을 조선총독부로부터 매축허가를 받아 시행했다.
1913년 착공한 제1기공사는 1917년 준공되었고, 이 과정에서 약 144,188평의 토지가 새로이 생겨났다. 이로 인해 동천 하구의 갯벌이 사라지고, 바다와 육지의 경계가 확연이 드러나게 되었다. 한편, 제2와 3기 매축공사는 회사의 형편으로 중단되었다가 1926년 11월 범일동과 우암동 앞바다를 포함한 305,690평(혹은 313,240평)의 매립허가를 받아 착공하였다. 이 중 절반에 해당하는 162,050평은 1932년 12월(준공일이 정확하지 않음)에 준공하하였으며, 제3기 매축공사(151,190평)는 1938년 8월에 준공할 예정이었으나 정확한 완공 시점은 알려지지 않았다.
부산진 제1기 매축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1915년부터 전차 시내노선이 운행되었고, 매축지 인근에 경부선 철로도 연결되어 있어, 부산진매축지는 공장 입지로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 그러나, 제1기 매축공사가 완료된 지역에 정미소, 목재소 등이 일부 설립되기는 했지만, 그 외 수요자가 나타나지 않아 빈터로 남아 각종행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정월 대보름 부산진 사람들의 줄다리기, 경마등 각종 경기가 매축지 공터에서 행해지기도 했다.
1927~28년 당시 현 범일동 커넥트 현대 뒤편에 위치한 철도 부산진역이 수정동 매축지로 이전되었고, 제2기 매축공사 직후 영도대교가 1934년 준공되었다. 제3기 공사 완료 무렵 중일전쟁이 발발(1937년 7월 7일)하고 이어서 1942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진 2, 3기 매축지도 제대로 분양되지 않아 시행사가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사진 8]‘1907년경 부산진성과 영가대 일대 해안 마을 모습_사진엽서
Ⓒ김한근 소장

[사진 9]‘부산진 제1기 매축공사’ 수정동 일대 해안 매축지 모습_ 1926년 발행
Ⓒ『부산대관』수록사진

[그림 5 1924년 발행「부산」지도에 나타난‘제1기 부산진매축공사’부분과 옛 해안선
(지도 위에 청색선으로 표기된 부분이 옛 해안선으로 부산진 제1기 매축공사부분과
이후 하천 직강화한 부분과 매축지 위로 철로가 놓여진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김한근 소장
7) 1934~1944년 시행한 ‘적기만 매축공사’
1888년 4월 준공된 ‘부산해관매축공사’ 이후, 부산항의 매축공사는 계속 북쪽 해안 매축으로 이어졌다. 이는 부산의 지형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 동쪽은 바다에 면하고 있지만, 서쪽은 다소 급격한 경사를 지닌 산의 이음, 즉 수정산에서 구봉산-쌍산-복병산-용두산으로 이어지는 산들로 인해 동쪽 바다쪽 해안의 평지는 초량동 일대에만 약간 유지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외국, 특히 일본과의 교역량이 늘어남에 따라 항만 연관설비를 비롯하여 물량장, 창고 등의 수요가 계속 늘어나고 있어 항만 배후부지 확보를 위한 매축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지금의 중구에서 동구에 이르는 북항 해안매축공사 외 북항의 남구지역 매축공사는 1934년 4월부터 1944년 말까지 총 3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제1기 공사는 1934년 4월부터 1937년 8월까지 우암동 해안 약 10만1천7백평을 매축했으며, 이어서 진행된 제2기 공사는 1940년 2월까지 적기만이라 부르는 감만동 해안 약 18만7천백여평을 매축했으며, 제3기 공사는 1939년 7월 착공하여 1944년 말까지 현 제8부두 축조공사를 위해 3만2천여평을 매축했다.

[그림 6] 1934년 발행「부산」지도에 나타난‘제2기 부산진매축공사’부분
([그림 5] 와 비교하여 보면 오늘날 범일동 매축지마을이라 부르는 일대 매축현황을 이해할 수 있다)
Ⓒ김한근 소장
8) 1916~1940년 시행한 ‘영도대풍포 매축공사’
이러한 북항 일대 매축공사가 연이어 지속되는 동안, 당시 공업단지였던 영도지역 매축공사와 향후 어업항 발전을 위한 남항매축공사도 실시되었다.
먼저 영도지역의 경우 흔히들‘ 영도깡깡이마을’로 알려진 대평동 일대가 조선철강산업단지로 특화(?)된 것은 1905년 전후한 시기였다. 돛과 노에 의존하여 운항되던 배가 산업화의 영향으로 기계 발동기를 장착한 동력선 시대를 맞이하면서 일찌감치 조선 선박회사들이 자리잡고있던 영도지역 조선업은 1910년대부터 큰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대평동 일대 지형은 오랜 세월동안 형성된 퇴적토 지형으로 그 모습이 마치 사람의 코처럼 튀어나온 곳이라 하여‘ 주비(洲鼻)’라고도 불렀던 곳이었다. 이곳을 선박과 관련산업 특화단지로 개발하기 위한 본격적인 매축사업을 시작한 것은 1916년이었다. 이후 1926년 6월까지 실시된 이 공사가 ‘대풍포매축공사’이다. 대풍포 매축공사는 이후에도 5~6차례 추가 보강공사를 통해 오늘날 대평동을 이루었다.
대풍포 주요공사가 끝날 즈음인 1926년 5월 영도지역 조선업자들이 현 봉래동 대선조주식회사가 자리한 일대 3,722평을 매립했다. 또한 인근 HJ중공업이 된 옛 조선중공업주식회사 부지 확보를 위한 매축공사도 1930년대 중반에 실시하여 1937년 7월부터 공장 가동에 들어갔다.

[사진 10] 1910년경 영도 봉래동 해안 모습
(대선조선(주) 일대 당시 모습으로 가운데 하얀 벽면이 보이는 창고같은 건물은 라이징 썬 석유회사 건물이다)_사진엽서
Ⓒ김한근 소장
9) 1932~34년 시행한 ‘영도대교 가설공사’
1932년 착공한 영도대교(당시 부산대교) 가설(架設)공사 당시 영도지역 뿐 아니라 북항 어항지역 일부와 교각이 놓이는 부분 등의 매축공사를 병행하여 실시했다. 당시 북항 어항지역 일부 매축공사를 실시하면서 현 중앙동 부산우체국 일대 매축공사를 시행하면서 영도대교에서 부산역 앞으로 이어지는 중앙대로가 형성된 것이다. 영도대교 가설공사 과정에서 옛 용미산을 헐고 이후 그곳에 부산부청 신축공사를 실시하여 1936년 완공했다. 지금의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자리한 부지가 그곳이다.

[그림 7] 1934년 영도대교 준공당시 매축된 부분과 중구지역 토취장
(현 롯데백화점 광복점 자리에 있었던 용미산이라 부르던 언덕을 깍으면서 발생한 토석을
부산데파트 건너편 현 중앙동 6가 일대와 부산우체국 건너편 중앙동 5가 일대를 매축하는데 사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옛 용미산 언덕 위에 있었던 용미산신사를 용두산 공원 남쪽 측면을 깍아 정비한 자리로 이전했음도 알 수 있다)
_1936년 발행『영도대교 준공사진첩』에 수록된 「영도대교 준공평면도」
Ⓒ김한근 소장
10) 1930~1932년 시행한 ‘남항 제1기 매축공사’
남항매축공사는 제1, 제2기로 구분하여 실시했는데 제1기 공사는 1930년 5월 남항방파제 가설공사를 시작으로 영도대교 옆에서 충무동 입구 보수천 하구에 이르는 44,860평 매축공사로 1932년 12월 완공했다. 제2기 공사는 지난 시간에 언급한 바와 같이 1934년 2월부터 1938년 6월까지 매축공사에 이어 마무리공사는 1940년까지 이어졌다. 이 가운데 남항 1기 매축공사 부분은 현 서구청 건너편 비프광장로에서 남포길에 이르는 도로의 남쪽 부분에 해당하는데 오늘날 남포동 대부분이 이에 속한다. 해방후 에도 남항의 자갈치해안 일대에 대한 소규모 매축공사가 지속되면서 오늘의 자갈치 해안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사진 11] 1903년 남포동 해안 모습
(남포동 해안의 옛 지형이 용두산 구릉이 해안까지 연결되어
해안 언덕을 이룬 부분과 해안 자갈이 사구 형태로 이루어진 부분으로 구분되어 보인다)
Ⓒ김한근 소장

[그림 8] 1924년 발행「부산」지도의 현 남포동 일대 부분_ 1924년발행「부산」지도
Ⓒ김한근 소장

[그림 9] 현 남포동 일대 지도와 옛 해안선
(1924년 지도에 나타난 남포동 옛 해안선을 현재 지도 위에 청색선으로 표기했다)
Ⓒ네이버지도
11) 1936~1945년 시행한 ‘부산항 제3기 축항공사’
일제강점기 부산 북항의 위용을 보여주는 마지막 공사는 1936년 시작되었다. 지금은 북항재개발로 인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우리가 오랫동안 불러왔던 북항 제3, 중앙부두, 4부두가 일제강점기 일본의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추진한 대규모 매축공사였다. 1936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부산항 제3기 축항 공사는 먼저 제3부두 축조공사를 1941년 완공하고, 이어서 제4부두는 1943년에 완공했다. 제3부두와 4부두 사이 중앙부두는 해방 직전까지 시행했다.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부산 제3기 축항 공사를 통해 해면 약71만 743㎡(약 21만5천 3백여평)를 매립하고, 부산항 제3·제4 부두, 북방파제와 함께 부산항 중앙 부두를 축조하였다.
이들 부두는 1937년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 중에도 전쟁물자 수송을 위해 공사가 진행되었다. 특히 중앙부두 축조 공사가 진행되는 중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패전국이 되면서 마무리하지 못하여 해방 후 1963년까지 현 부산역 일대에 거대한 물웅덩이가 남아 있었다.

[그림 10]‘부산항 제3기 축항공사’ 부분_ 위쪽 가운데에서 왼쪽 아래로 청색선으로 표기한 부분이 옛 해안선이며,
갈색 부분은 기 매축된 부분, 청색으로 표기된 부분이‘부산항 제3기 축항공사’부분이다.
하늘색으로 표기한 부분은‘부산항 제3기 축항 공사’이후 물웅덩이로 남아있던 부분이다.
회색 점으로 표기한 부분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란수도 부산 당시 미군 저유탱크 가 자리한 곳이다
Ⓒ김한근(네이버지도에 필자가 그린 그림)

[사진 12] 1951년 하늘에서 내려다 본 부산 북항 부두 일대
(왼쪽 제2부두에서 제3부두 사이에 중앙부두가 있고 제3부두 오른쪽 에 제4부두가 보인다.
중앙부두 뒤쪽 현 부산역 광장 일대에 거대한 물웅덩이가 보인다)
Ⓒ김한근 소장
2. 지도로 보는 일제시기 중구와 동구 해안 매축 부분

[그림 11] 일제시기 부산 원도심 일대 매축현황 지도
(청색으로 표기된 선이 옛 해안선이다)
Ⓒ김한근(네이버지도에 필자가 그린 그림)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부산향토사를 연구,
사라지는 옛 추억을 사료로 살려내는 '역사 수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