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도시 크라이스트처치, 글로벌 극지협력 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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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연구 복합단지, 국제협력의 산실
국제남극센터가 대중을 위한 열린 공간이라면, 그 인근에 자리 잡은 ‘남극연구 복합단지(Antarctic Campus)’는 철저한 보안 속에 운영되는 남극 작전의 사령부라 설명할 수 있다. 이곳은 뉴질랜드 남극연구소(Antarctica New Zealand), 미국 남극 프로그램(US Antarctic Program), 남극유산신탁(Antarctic Heritage Trust), 그리고 대한민국의 한-뉴질랜드 남극 협력센터가 입주한 명실상부한 국제 남극 협력의 거점이다.
복합단지의 약 3분의 1 규모는 미국국립과학재단이 운영하는 남극 프로그램을 위한 항공 물류 단지(정비창 포함) 및 활주로로 활용되고 있다. 미국은 1955년부터 이곳을 맥머도 기지 보급의 전진기지로 사용해 왔으며, 현재도 C-17 수송기를 운용하는 제304원정공수비행대대가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제남극연구센터 건물 1층에는 뉴질랜드, 한국, 이탈리아 등 3개국이 입주해 있으나, 2층은 미국이 전체 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한국의 남극 활동에 있어 생명선과 같은 대한민국 극지연구소의 한-뉴질랜드 남극 협력센터는 2000년대 초반 설립되어 양국 간 극지 연구 협력을 증진하고 있다. 이곳에는 상주 직원이 파견되어 아라온호의 보급, 장보고기지 연구원들의 이동 지원, 긴급 자재 조달 등을 역할을 수행한다. 극지연구소는 이외에도 칠레에 한-칠레 남극 협력센터, 노르웨이에 KOPRI-NPI 극지연구협력센터를 운영하며 글로벌 극지 연구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이처럼 여러 국가의 남극 프로그램이 한곳에 물리적으로 공존함으로써, 비상 상황 시 장비 공유, 의료 지원, 항공편 공동 이용 등 즉각적인 국제 협력이 가능한 '남극 물류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 복합단지에는 극지 연구 장비와 의류가 보관된 대규모 창고가 있으며, 각국 연구팀이 남극 출발 전 최종 점검과 보급품 적재를 진행한다. 이러한 인프라 덕분에 크라이스트처치는 단순한 경유지가 아닌, 남극 연구의 필수적인 전진기지로 자리매김했다.

남극연구 복합단지(Antarctic Campus) 배치도
© 장하용 작성

남극연구 복합센터 내 극지물품 보관소
© 장하용(촬영일 : 2023.10.30.)

미국 남극 프로그램 센터 전경
© 장하용(촬영일 : 2023.10.30.)
지식의 거버넌스: 게이트웨이 안타티카와 COMNAP
캔터베리 대학교의 ‘게이트웨이 안타티카(Gateway Antarctica)’는 1999년 설립된 남극학 융합연구 전문 기관이다. 남극 거버넌스, 남극 생태계, 대기-기후-빙권 상호작용이라는 3대 연구 테마를 중심으로 다학제적 접근을 통해 남극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다. '남극 연구 대학원 수료 과정(PCAS)'은 16명의 소수 정예 학생을 선발하여 4주간 집중 교육과 스콧 기지 인근 현장 연구를 수행한다.
크라이스트처치의 위상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국가남극프로그램책임자위원회(COMNAP)’ 사무국이 이곳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1988년 설립된 COMNAP은 29개 회원국의 남극 활동을 조율하는 기구로, 1989~1997년 미국 워싱턴, 1997~2009년 호주 호바트를 거쳐 2009년부터 크라이스트처치에 사무국을 두고 있다. 비상 상황 시 각국 자산을 동원한 구조 활동 조율, 쇄빙선 운항 정보 공유, 환경 및 안전 표준 수립 등이 COMNAP의 주요 역할이다. COMNAP이 위치한 국가는 전 세계 남극 연구 허브 역할을 할 기회를 얻을 수 있어, 향후 북극항로 분야에 COMNAP과 같은 기관을 대한민국이 주도적으로 신설하고 이를 부산에 유치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게이트웨이 안타티카 세미나 장면
© 장하용 (촬영일 : 2023.11.3.)

국가남극프로그램책임자위원회(COMNAP)
©COMNAP 홈페이지
리틀턴항, 남극으로 가는 생명선
1849년 설립된 리틀턴 항구는 크라이스트처치에서 12km 떨어진 천연 항만으로, 남극 연구선의 최후 기항지다. 뉴질랜드, 미국, 이탈리아, 한국, 중국, 러시아 등 각국의 남극 기지 물류를 지원하며, 매년 1,000명의 연구원이 이곳을 거쳐 남극으로 들어간다. 대한민국의 아라온호도 장보고기지와 세종기지 자재를 이곳에서 공급받는다.
리틀턴 항만공사는 향후 30년 마스터플랜을 수립하여 미드랜드 포트 개발과 드론 기술 도입 등 항만 인프라를 확충하고 있다. 최근 도입한 파일럿 선박 '테라 노바'호는 스콧 원정대의 탐험선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항구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멸종 위기종 쇠푸른펭귄 보호를 위한 탐지견 도입 등 환경 친화적 항만 운영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2007년 연구에 따르면 남극 관련 활동은 캔터베리 지역에 연간 2억 4,300만 달러의 경제적 효과를 창출한다. 뉴질랜드 전체로는 4억 1,500만 달러의 경제적 기여를 하는 것으로 연구되었다.

리틀턴항 위치도
© 장하용 (촬영일 : 2023.11.2.)

리틀턴항에서 남극출항을 준비 중인 아라온호
© 연합뉴스
남극 체험 인프라의 다양화
크라이스트처치는 연구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남극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인프라도 마련되어 있다. 1978년 설립된 크라이스트처치 극지방 박물관은 극지 탐험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스콧과 섀클턴의 탐험 유물, 극지 동식물 표본 등이 전시되어 있다.
마운트 쿡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 알파인 센터에는, 1953년 에베레스트 산을 최초로 정복하고 1958년 뉴질랜드 최초 남극 원정을 이끈 힐러리 경의 업적을 기리는 공간이다. 이 센터에는 그가 일반 트랙터를 개조해 남극 탐험에 나선 장비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반 동료였던 텐징 노르게이와 뉴질랜드 극지 개척 관련 다양한 인물들의 사료와 장비도 볼 수 있다.
크라이스트처치는 또한 아남극권 자연환경을 체험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마운트 쿡 국립공원에서는 타스만 빙하(길이 약 27km, 폭 4km, 최대 깊이 600m) 트래킹을 통해 남극과 유사한 빙하 환경을 체험할 수 있다. 기후변화로 인해 19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축소되고 있는 타스만 빙하는 남극 빙상의 변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살아있는 교육장이다. 테카포 호수에서는 밤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는 '스타게이징(Stargazing)' 프로그램이 운영되며, 38도로 유지되는 인공 온수장에서 남반구의 천체를 관측하는 독특한 경험을 제공한다.
2020년 11월 완공된 리틀턴의 새로운 크루즈 선석은 6,700만 달러(약 900억 원)를 투자한 뉴질랜드 최초의 맞춤형 크루즈 시설이다. 세계 최대 크루즈선을 수용할 수 있으며, 지진과 폭풍에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를 통해 크라이스트처치는 남극 관광의 출발점으로서도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 알파인 센터 내부
© 장하용 (촬영일 : 2023.11.1).

테카포 스타게이징 프로그램
©테카포 스타게이징 홈페이지
준비된 도시만이 극지의 문을 열 수 있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는 200년 가까이 남극의 관문으로서 역할을 해왔다. 남들보다 일찍 남극의 가치를 알아보고, 지속적으로 투자하며, 국제 협력의 플랫폼도시를 구축했다. 그 결과 인구 39만의 도시가 남극 시대의 글로벌 극지허브도시로 성장했다.
크라이스트처치의 성공은 지리적 이점, 역사적 유산, 미래를 향한 투자의 결합에 있다. 국제남극센터, 게이트웨이 안타티카, COMNAP 유치, Days of Ice 축제등은 서로 시너지를 내며 도시의 위상을 강화했다.
부산도 이미 세계적인 항만과 조선·해양 산업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부산에 소재한 해양기관과의 극지클러스터를 강화하고, 크라이스트처치와 같은 극지도시와의 교류를 확대하며, 극지 체험 인프라를 구축한다면 동북아 북극항로의 관문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이미 가지고 있다.
북극항로를 통과한 선박의 뱃고동 소리가 부산항에 울려 퍼질 때, 그 선박을 맞이하는 부산은 단순한 관문도시가 아니라 인류의 자산인 북극해의 평화적 이용을 관장하는 '북극항로의 관리자도시'로서 우뚝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레이크 데카포 전경
© 장하용 (촬영일 : 2023.11.1.)


장하용
부산연구원 미래전략기획실장
책임연구위원
공학박사
해양정책의 방향은 변화의 흐름 속에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해양정책·국가 전략 수립 및 미래 해양도시비전 연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