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바다를 일궈온 인어, 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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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는 언제 적부터?
‘해녀(海女)’는 “아무런 기계장치 없이 맨몸으로 바다 밑에 잠수해서 전복・소라・미역・우뭇가사리 등 해산물을 직업적으로 채취하는 여성”이다. 해녀 어업은 화산섬 제주도의 척박한 토양으로 인해 농업 식량이 절대 부족한 여건을 해안 암반의 풍부한 어족자원으로 대체 극복하는 과정에서 출현했다.
해녀의 본고장인 제주도에서는 이들을 ‘잠수(潛嫂)’, ‘잠녀(潛女)’라 부르고, ‘전복을 따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을 뜻하는 ‘비바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기에 해녀와 전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해녀들이 채취한 것으로 보이는 선사시대 전복 껍데기 유물을 통해 2천 년 전 탐라 건국 이전부터 해녀와 같은 잠수인의 존재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신천리 한못궤굴 유적에서 출토된 전복 껍데기>
신석기시대, 4천년 전
<하모리 유적 출토 뼈 연모 (전복 껍데기와 같이 출토됨)>
신석기시대, 3,500년 전 / 용도 : 후대의 빗창과 같이 전복을 채취하는 데 쓰임
<김녕리 유적에서 출토된 전복제 화살촉 >
초기철기시대, 2천년 전
일본의 옛 도읍지 나라의 헤죠코(平城宮) 유적에서 745년 연호와 ‘탐라복(耽羅鰒) 6근(六斤)’이라고 적힌 목간이 출토되었다. 이 ‘탐라복’은 탐라에서 일본에 전해진 조공품으로 추정된다. 탐라시대에 전복이 조공외교의 주요 품목으로 등장할 정도로 상당한 양의 전복을 채취하던 탐라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쉽사리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전복 따던 사람들은 잠수하는 여인(후대의 잠녀, 해녀)들의 원초적 모습이라고 추정할 수 있겠다.
<일본 나라의 헤죠코(平城宮) 유적에서 출토된 745년 연호와 ‘탐라복(耽羅鰒) 6근(六斤)’이라고 적힌 목간>
조선시대 해녀
조선시대에는 해녀[潛女]의 존재가 기록을 통해 뚜렷이 확인된다. 1630년 즈음에 제주를 다녀간 이건(李健)의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에는 잠녀를 주로 “바다에 들어가서 미역을 캐는 여자”이면서 부수적으로 “생복을 잡아서 관아에 바치는 역을 담당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조선시대 해녀[잠녀]들은 관아에서 작성한 잠녀안(潛女案)에 등록되어 그들 채취물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진상 또는 관아용 명목으로 상납해야 했다. 조선시대 해녀인 잠녀는 주로 미역을 캐는 사람들인데도 전복을 따는 일까지 모두 제주 해녀의 몫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전복 진상역은 남자들의 몫이었다. 김상헌의 남사록(1601)에는 “포작(鮑作, 제줏말로 보재기)들이 진상하는 전복의 수량이 매우 많아서 그 역을 견디지 못하여 섬을 떠나 도망친다.”고 하였듯이, 전복 따던 포작들이 제주섬을 대거 떠나버렸다. 남정 보재기가 지던 전복 진상역도 제주 잠녀들에게 넘어왔다.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은 “섬 안의 풍속이 남자는 전복을 따지 않으므로 다만 잠녀에게 맡긴다”고 하였다. 이제 전복 따는 일은 오로지 잠녀의 몫으로만 인식되었고, 유교의 민간 보급에 따라서 남자들은 잠녀들을 ‘비바리’로 천시하기까지 했다.
<탐라순력도(1702)에 실린 잠녀의 물질 모습>
조선시대 잠녀는 국가의 진상역에 얽매인 존재였다. 처음에는 미역 등을 주로 따다가 포작들이 역을 피해 제주를 떠나버리면서 역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부족해짐에 따라 조선 후기로부터 점차 전복을 주로 채취하는 ‘비바리’가 되었다. 조선 후기 ‘출륙(出陸)금지령’과 다른 지역에서 보이지 않는 ‘여정(女丁)’의 존재, 독특한 ‘여다(女多)’의 상황 등은 여성 수난의 징표이다.
19세기 말 직업으로 전환
1876년 개항으로 제주 해녀들은 두 가지 변화를 겪었다. 조선시대의 ‘출륙 금지’에서 벗어나 타지역으로 출가(出稼)를 하며, 임노동을 통한 ‘돈맛’을 보게 되었다. 반면 일본 어민의 진출에 따라 제주 어장이 황폐화됨으로써 해녀들의 채취량은 부쩍 줄어들어 생존권을 위협받게 되었다.
제주 해녀들의 출가는 1887년 경남 부산의 목도(牧島 ; 지금의 영도)로 간 것이 시초였다. 이후 일제강점기로 들어오면 한반도 남부 지역뿐만 아니라 북부 지역, 일본, 따렌[大連], 칭다오[靑島],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넓어져 갔다. 출가 해녀 수는 1910년대에 2,500여 명이던 것이 1930년대로 들어오면 4,000여 명에 달하였다. 해녀들은 매년 4월경에 출가하여 9월까지 일했는데, 해녀가 많이 분포한 구좌면·성산면의 경우 이들의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이나 될 정도였다.
<녀를 반기는 물나라 사랑 (제주도 전복 따는 해녀)>
Ⓒ매일신보 1928년 8월 1일
제주도의 해녀군
제주도에는 1만여의 해녀가 있어서 해녀업조합도 성립되었다. 그중에서 2천인가량은 도외로 나가서 내지(일본) 등지에서 벌이를 한다는데 해녀는 운수 좋은 날이면 1일에 2원 이상의 벌이를 하고 보통이면 7∼80전 가량인데 1개년에 해녀가 제주도 내에서 30만 원 이상을 수확하여 도민경제에 중요한 일부분을 점하였다한다. 왕년에는 해안 가까운 곳에서도 풍부한 수확이 있었으나 해녀가 거츠러트려서 근년에는 심해에까지 들어가지 않고는 별로 수확이 없다 한다.
Ⓒ매일신보 1928년 8월 4일
Ⓒ국립해양박물관
<작업하는 잠수부의 모습>
Ⓒ국립해양박물관
해녀어업의 특징
해녀 어업의 자연친화적 채집 기술은 장기간 지속되어 왔다. 해산물 채취 시기, 작업 시간, 채취 가능한 해산물의 크기, 물질에 필요한 기술과 도구를 통제하는 생태적 자원 관리를 통해 생물 다양성 보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해녀들은 바닷속 지형, 바람과 조류, 물때에 대한 생태환경 지식은 물론, 해산물을 채취하는 특유의 다양한 물질 기술 등 전통지식과 기술을 오랜 세월 동안 전승시켜 왔다. 또한 섬 밖으로 진출한 ‘바깥 물질’을 통해 이러한 지식과 기술이 국내외에 보급됨으로써, 제주도는 동북아시아 해녀 어업의 거점이 되었다.
해녀들은 물질 기량과 나이, 품성 등에 따라서 상군・중군・하군으로 구분되는 능력 중심의 질서 체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질서는 지식・기술의 전승 체계이면서 협업과 상호 안전을 위한 버디 시스템(Buddy System)에 다름없다. 이 질서 속에서 해녀 공동체의 수평적이며 호혜적인 문화가치 시스템과 사회 조직망이 구축된다.
해녀어업의 미래가치
해녀 어업은 선사시대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온 오랜 역사적 경험 속의 산물로서 미래 제주지역의 지속 가능한 자원 유산이다. 깊은 바닷속에서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의한 호흡 조절로 해산물을 채취하는 전문직 여성이 바로 오늘날의 제주해녀이다. 해녀는 제주의 강인한 여성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반농반어의 경제활동을 해온 제주해녀들은 화산회토 토양을 일구어 밭을 가꾸어냈듯이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바다 밭을 일구었다.
수산물 채취를 통하여 가정경제의 주체적 역할을 하면서 반농반어의 전통 생업과 강력한 여성 공동체를 형성하여 남성과 더불어 사회경제와 가정경제의 주체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양성평등의 한 모범이기도 하다. 제주해녀는 19세기 말부터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국외로 진출하여 제주의 경제 영역을 확대한 개척자이기도 하다.
해녀 어업은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른 해녀 인구 감소와 해녀 인구 고령화,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양생물자원 고갈 등으로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지난 2016년 ‘제주해녀문화’가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앞으로 ‘바닷속, 맨몸, 전문직 여성 공동체’ 해녀 어업 유산의 보전과 육성을 위한 역동적인 실천에 나설 때이다.
Ⓒ제주도청
제주대학교 연구교수, 제주4.3연구소장, 제주학연구센터장을 역임하며 제주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다.
「제주학인물사 : 20세기 제주를 빛낸 여성들」, 「제주해녀투쟁의 역사적 기억, 탐라문화 30」 등을 연구 및 논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