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INESS Hip한 한국형 서프보드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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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핑하고 나오는 필자>
ⓒ허석환
처음 서핑을 시작한 해
처음 서핑을 시작한 2001년부터 대략 2010년 정도까지 서핑은 국내에서는 너무나 무지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즐기는 익스트림 스포츠의 하나였다. 전국적으로 서핑을 가르치는 곳은 거의 없었고, 뭔가 필요한 장비를 하나 구입하는 것도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서핑을 너무 사랑하고 미친 듯이 하고 싶었지만, 한국의 형편은 그렇지 못해 매일매일 그에 대한 불만과 푸념만 가득했다. 그러다 운 좋게 영어 어학연수를 겸해 호주에 잠시 살 기회가 있었는데, 2003년과 2004년 스스로 서프보드를 수리하는 딩1) 리페어 (ding repair)를 동네 작은 서프 숍에서 배우고 나중에 발리에서 우연히 만난 서프보드 수리 전문가에게 좀 더 디테일 한 서프보드 수리 방법을 배웠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종종 내 보드나 지인들의 보드를 수리해 주고 있는데 문득 보드를 직접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보드를 제작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재료인 BLANK2)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알게 된 한 대만 업체에서 보드를 OEM방식으로 제작해 줄 수 있다. 그리고 보드를 수주하게 되면 블랭크도 한두 개 보내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뭔가 길이 열리나 싶었다. 첫 오더를 통해 원했던 블랭크를 얻을 수 있었지만 작은 작업장도 없는 학생 신분인지라, 나머지 재료들도 도저히 구하기 힘든 시절이었던지라 아우트라인만 만들어보고 한동안 제작 자체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1) Ding- 딩 , 보드에 난 상처,데미지
2) BLANK - 서프보드 본체를 만드는 기본 재료, 폴리 우레탄이나 EPS 폼을 재단해 대략적인 보드 형태를 만들어놓은 것, 이 블랭크를 깎아서 서프보드를 만들기 때문에 보드를 만드는 사람을 SHAPER라고 부른다.
<서핑 후 필자와 지인들>
ⓒ허석환
그 시절 서핑을 함께 했던 사람들
그렇게 첫 오더를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샘플 개념의 발주라 전체적인 디자인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이미지나 색상 표현 등,퀄리티 체크를 위한 소량 발주만 진행했고, 전체적인 퀄리티 면에서 다소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이후 여러 곳의 공장과 콘택트하고 미팅을 하면서 이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전체적인 흐름을 만들어 줬다.
그러면서 2007년 본격적으로 서프보드 주문 제작 시스템을 만들어 지금 ‘블랭크스 서프보드 디자인’의 전신인 “Ganda Surf”를 만들었다. Ganda Surf는 테스트 모델들을 제외하고는 초보자들을 위한 올라운드 성향의 보드를 주로 만들었다. 아직 한국 서핑은 태동기인데 나조차도 서핑을 엄청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모든 포커스는 초보자가 타기 쉬운 보드, 튼튼한 보드에 맞춰져 있었다. 마침 강원도 양양이나 부산의 송정 등에 지인들이 서프 숍을 오픈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우리 브랜드를 조금씩 알려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사업의 규모가 아직은 미미해 본업은 따로 있고, 세컨드 잡으로서 서프보드 브랜드를 운영해 갔다.
2015년 퇴사 이후 본격적으로 서프보드 사업을 진행해 보고자, 강원도 고성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현재의 BLANKS SURFBOARDS DESIGN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했으며, 지금은 기존의 초보자 들을 위한 보드를 만든다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중상급자까지 두루두루 탈 수 있는 높은 퀄리티의 보드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BLANKS SURFBOARDS DESIGN 간판>
ⓒ허석환
BLANKS SURFBOARDS DESIGN의 시작
블랭크는 서프보드를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재료이다, 처음 브랜딩을 생각하면서 이 블랭크가 도화지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쩌면 이 블랭크에 사용자가 원하는 것들을 담고 이를 바탕으로 서프보드를 만들면 재밌지 않을까? 각자의 개성이 묻어 나오는 그런 보드를 만들었으면 하는 뜻을 담아 지금의 블랭크스 서프보드 디자인(이하 블랭크스 서프)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의 블랭크스 서프는 클래식 스타일 서프보드 제작에 중점을 두고 있다. 강원도로 이주한 이후 하이 퍼포먼스보다는 차분한 클래식 스타일이 나에게 더 맞는 서핑 스타일인 거 같아서 거기에 맞춰 샘플 발주와 테스트를 진행하다 보니 지금은 완전 클래식 스타일의 서프보드에 푹 빠져있다.
클래식 스타일의 서핑은 보통 PU코어3)를 사용해서 제작하는데, 차분한 라이딩과 로깅4) 등을 하기 위해서 하드 엣지를 없애고, 전반적으로 묵직한 느낌으로 보드를 디자인한다. 여기에 PU 코어의 깨끗하고 부드러운 소재의 특성 때문에 틴팅5)을 통해 깔끔하고 차분한 느낌의 디자인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 기술들을 바탕으로 올드스쿨, 레트로 한 옛날 60~70 년대 감성을 지닌 보드들을 주로 디자인하고 생산해 왔는데, 의외로 이런 느낌이 젊은 층에 관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클래식한 보드만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니즈에 맞춰 하이 퍼포먼스를 위한 보드도 수시로 제작하고 있다. 하이 퍼포먼스 보드들은 가급적이면 가볍고 빠른 반응성을 가져 사용자가 원하는 움직임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형태로 보통 제작을 하는데, 최근 서프보드 제조기술이 에폭시 계열로 발전하면서 에폭시 와 카본 등의 좀 더 공격적인 서핑이 가능하게 점점 발전하고 있다. 이에 맞춰 블랭크스 서프에서도 다양한 소재를 테스트해 보며 사용자 중심의 보드를 계속 만들어 가고 있다.
3) PU 코어 - 폴리 우레탄으로 만들어진 블랭크를 일컬음.
4) Logging - 클래식 스타일 서핑의 기술 중 하나로 서프보드 위를 걸어다니는 기술을 말한다.
5) Tintting - 보드 코팅을 위해 사용하는 폴리에서터 수지 자체를 조색하여 코팅하는 기술
<서프보드를 제작하는 모습>
ⓒ허석환
블랭크스 서프보드 디자인은 앞으로 계속 늘어가는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하드웨어를 계속 생산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 다만 조금 더 사용자 특화나 디자인이 포커스를 맞추고, 국내에서 아직은 많이 생소한 소재들을 계속 테스트해 나갈 예정인데, 그중 하나가 '나무'이다. 나무로 보드를 제작하는 것은 아주 전통적인 서프보드 제조방식 중 하나이지만, 근대에 와서는 다양한 소재의 발달과 FRP6) 등을 사용해 쉽게 서프보드를 제조할 수 있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소수의 사람들만이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는 제조방식이다.
하지만 더 친환경적이고 사용자 친화적인 소재인지라 항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쉽지 않은 제작 과정과 재료 (Balsa, 벽오동 나무) 등을 구하기 쉽지가 않다. 그래서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나무를 여러 가지 테스트해 보고, 그것들을 가지고 과연 실 사용이 가능할지를 테스트해 볼 예정이다.
이후, 이 제작 과정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한 Wooden Surfboards making 클래스를 기획해서 운영할 예정이며, 함께 연구 개발해 나가며, 좀 더 환경과 사람을 생각하는 서프보드를 제조해 볼 계획이다. 또한 서프보드의 개발, 제작과 더불어 핀7) 또한 제작 준비 중인데, 이 또한 보드 제작과 더불어 함께 성장해야 할 주요한 인프라로 기존의 제품들을 베이스로 조금은 한국적인 느낌의 이미지를 넣어 만들어 볼 생각 중이다.
6) FRP - Fiber Reinforced Plastic 섬유와 수지를 사용한 선박 제조기술.
7) Fin - 물고기 지르러미를 닮은 서프보드의 방향타 역활을 하는 부분.
<서프보드 Fin>
ⓒ허석환
한국 서핑 시장의 미래
현재까지의 한국 서핑 시장을 보고 있으면 약간은 기형적인 형태로 성장 중인 게 아닌가 약간 염려스럽다. 전국에 수백 개의 서핑 숍 이 생겼지만, 이는 대부분 서핑 강습과 렌탈만을 하는 교육장과 그 안에서 숙박과 F&B에 좀 더 비중을 많이 두고 있는 형태로 발전했다. 이런 숍들을 통해서 서핑이라는 운동 자체를 알리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을 했지만, 아직 늘어나는 인구에 비해 나머지 관련 산업에 대한 인프라는 아직 부족한 상태이다. 지금의 서핑 산업을 좀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지금의 숍들과 같은 일반적인 행보에서 더 나아가, 서핑을 하기 위해 필요한 각종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누군가는 서프보드와 서핑이 필요한 하드 굿즈를 한국의 기술로 만들어야 할 것이며, 이렇게 만든 made in Korea 가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서핑 장비가 될 수 있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함께 성장해 나갈 때, 서핑이 하나의 문화로써 삶의 방식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이 서핑을 즐길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서핑 강습 모습>
ⓒ허석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