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INESS 요코하마, 미나토 미라이 21의 완성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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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미라이 21 사업으로 한때 항만 재개발의 상징이었던 요코하마는 1859년 한적한 시골 어촌에 불과했으나 다른 아시아 항만도시들처럼 서양 세력에 의해 1859년 미일수호통상조약에 따라 개항을 통해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다른 개항 도시들은 크게 성장하지 못했으나 요코하마는 수도권이 있는 관동지방에 입지한 덕분에 1880년 일본 전체 무역액의 80%를 차지할 만큼 번성하였다. 일본 무역의 대부분을 처리하는 항만이 된 요코하마항은 1889년부터 1923년까지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아 지속적인 항만시설을 확장해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한테도 가슴 아픈 사건인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항만시설이 파괴되었지만, 다시 복구하게 되었다.
1945년 일본의 제2차대전 폐망으로 미국이 요코하마항을 점령하게 되었고 1949년 미즈호 부두와 신항 일부를 미국이 사용하는 조건으로 대부분의 항만시설을 일본에 반환하였다. 이후 요코하마는 1957년부터 1971년 일본 경제 호황기에 맞춰 빠르게 성장하였고 특히 요코하마 주변의 공업지대와 도쿄와 근접성 등으로 수도권 최대의 베드타운 기능도 동시에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고도성장은 산업구조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1965년 요코하마시는 ‘도심부 강화사업’을 통해서 미쯔비시 조선소의 이전, 구항지역의 노후 항만시설을 모두 도시공간으로 이전하는 사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 계획은 오일 쇼크 등으로 실행되지 못하다가 1979년 사이고 미치카즈(細郷道一) 당시 요코하마 시장에 의해 <요코하마 도심 임해부 종합 정비 계획>으로 발표되었고, 미쓰비시 중공업 요코하마 조선소의 이전이 완료된 1983년에 이르러서야 <미나토미라이21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도시계획과 사업면적이 확정되면서 착공되었다. 해당 사업은 2010년을 목표연도로 도시자족기능을 갖춘 항만기능을 병행한 복합도시 공간으로 개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 버블 붕괴로 인한 극심한 경기 침체와 교통망 정비 지연으로 초기 건설된 요코하마 랜드마크 타워와 퍼시피코 요코하마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입지가 공터로 남아 있었다. 이후 2000년대 들어와 요코하마시가 재차 기업 유치에 나서면서 사업이 다시 탄력을 받았고 신타카시마역 부근을 제외하면 대부분 건물이 들어찼다. 2030년 이전에 사업이 완성될 것으로 보이는데 최초 계획 이후 60년 이상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미라토 미라이 21 지역의 총 전체 면적은 1.86㎢로 요코하마시 나카구와 니시구에 걸쳐 있으며, 이 중 0.76㎢는 매립지이다.
미나토 미라이 21 사업지구는 레드브릭 웨어하우스, 코스모월드, 퍼시피코 요코하마, 요코하마 월드포터스, 퀸즈스퀘어, 미나토미라이 만요클럽, 해상보안자료관, 하라 철도모형박물관, JICA 해외 이주자료관, 미쓰비시 미나토미라이 기술관, MARK IS 미나토미라이, 오비 요코하마, 요코하마 랜드마크 타워, 닛폰마루, 항구박물관, 요코하마 미술관, 컵라면 박물관, 호빵맨 어린이박물관, 브릴리아 쇼트쇼트 시어터 등 다양한 시설과 이벤트 공간들이 구성되어 있다. 최초 도시계획은 거주인구를 수용할 계획이 없었으나 상업시설 중심으로 도시가 만들어지면 야간에 공동화 현상이 발생할 것으로 우려해서 수용 인구 대략 10만 8천 명 정도의 주거시설도 포함시켰다.
미나토 미라이 21 도시계획 ⓒ시사저널 뉴스 검색(2023. 9.19)
요코하마시의 미나토 미라이 21은 오랜 시간 일본 경제 성장, 쇠퇴 그리고 회생의 과정을 궤를 같이하면서 진행되어 온 사업이다. 도심부 강화사업의 목적은 부산 북항 재개발사업과 매우 비슷하나 시작 점에서 그 이유는 서로 다르다. 부산은 선박 대형화로 인한 항만 이전으로 항만물류관련 기능의 도심 이전으로 인한 공동화와 수도권 집중으로 인한 도시의 성장 기반 부족을 원도심에서 찾고자 했다면 요코하마의 미나토 미라이 21은 노후 항만과 공장 이전 적지 활용, 수도인 도쿄의 베드타운으로 전략해 버린 도시를 자체 도시 기능 강화를 통한 자족적인 도시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즉 부산은 잃어버린 한국의 2대 경제 도시 기능을 다시 찾고자 북항 재개발을 추진하였고 요코하마는 도쿄의 위성도시를 벗어나기 위해 미나토 미라이 21개발을 추진한 것이다.
미나토 미라이 21 전경 ⓒBing 블로그 검색(2023. 9.19)
요코하마시는 미나토 미라이 21사업을 통해 1983년부터 2016년까지 건설투자 효과는 총 2조 8,827억엔, 2016년 기준 도시 운영 효과는 연간 2조 446억 엔이라고 발표한 적이 있다. 2019년 기준 미나토 미라이 21사업지 내 입주기업이 1,810사이고 취업자 수는 10만 7천 명이다. 대략 35년 정도의 사업 결과치고는 보는 관점에 따라 성과가 크다고 할 수 없지만 요코하마라는 도시를 홍보하고 도시의 심장에서 지속적인 변화와 성장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무형의 효과까지 고려한다면 사업이 실패했거나 해당 경제적 효과가 작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부산 북항 재개발 사업도 다시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부산 북항 재개발 사업은 요코하마 미나토 미라이 21에 비해 사업 기간이 훨씬 짧다. 그러나 부산 북항 재개발 사업의 느린 진행을 우려하면서 주변에서 많은 질타와 비판이 쌓이고 있는 상황이다. 부산 북항 재개발 사업은 개발 방향과 방식 등에 대한 고민으로 지연이 되었고 사업 진행과정에서도 정부, 부산시, 해당 지자체 그리고 시민단체 등의 의견 조율 과정에서 수 차례 진행이 지연되었다. 부산 북항 재개발 사업을 바라보는 일부 관계자들은 북항 재개발 사업의 더딘 진행에 대해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나 미나토 미라이 21 사례를 볼 경우 신속한 진행만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신속한 사업 진행은 부산 북항 재개발 사업이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진행되지 않았다면 요즘처럼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바뀌는 시대에 변화하는 환경을 반영하지 못한 사업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요코하마 미나토 미라이 21 사업은 60~70년간 꾸준히 국가와 지자체의 경제 여건, 사회, 문화, 기술 등의 변화를 따라가면서 천천히 개발해 오고 있다. 이미 초기에 개발한 지역은 30-40년이 지났고 아직도 개발이 진행 중이다. 물론 오랜 시간동안 개발을 하겠다고 의도한 사업은 아니다. 그러나 조급함보다 문제가 있을 때는 쉬어가는 진리를 따랐고 그러다 보니 시대적 다양성과 함께 최근의 변화를 받아들여 가면서 전체 사업 계획의 골격은 유지하되 시대에 맞는 개발 사업이 되는 것이다. 사실 2000년대 초만 해도 ‘미나토 미라이 21’은 부산 북항 재개발 사업에서 바이블과 같은 벤치마킹의 대상이었으나 일본의 경제 하락으로 우리들의 관심사에서 많이 벗어났었다. 현재는 미나토 미라이 21의 개발 상황을 봐도 특별히 부산 북항이 벤치마킹해야 할 특별한 요소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지난한 시간과 과정을 견디면서 해당 사업을 시대 변화상에 맞춰서 지속적으로 개발해 나가고 있는 부분은 우리한테 시사하는 점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부산 북항 재개발 사업이 불필요하게 진행이 지연될 필요는 없으나 고민 없이 속도만 강조되어서는 절대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바뀌고 있는 시대상을 반영해 나가면서 북항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몇 년의 고민이 30~40년의 미래를 담을 수도 있는데 조급함이 5년도 담지 못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지금부터 30년 뒤에 다시 부산 북항 재재개발 사업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안 나오게 다시 한번 북항 재개발 사업에 대해 속도보다 정확한 방향과 필요한 내용들이 담기고 있는지 한 번 더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이성우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물류·해사산업연구본부 선임연구위원
포용과 통섭의 공간이 바다인 것처럼, 해양물류는 전체 물류산업을 연결하고 융합하는 산업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양도시의 물류 및 경제산업에 관한 전문위원으로 활발히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