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INESS 조선소는 어떻게 로봇 도시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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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한 역사에 그렇게 짧은 메시지
100년 가까이 운영한 조선소 문을 닫는다는 성명서는 A4 한 장을 넘기지 못했다. 길고 긴 역사에 비해 짧아도 너무 짧았다. 2009년 8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오덴세 조선소(Odence Steel Yard) 회장은 조선소를 폐쇄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극동의 저비용 조선소들이 선박 건조 능력을 늘리면서 조선업의 경쟁이 더욱 격화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 불어닥친 글로벌 경기 침체로 인해 조선소가 상당한 적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악화된 경영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신규 수주도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린도 도크에서 짓고 있는 배를 2012년 2월에 인도하면 오덴세 조선소는 완전히 문을 닫게 된다.’ 글로벌 최대 컨테이너 선박 회사인 머스크 라인이 1917년에 자체 선박을 건조하기 위해 세운 오덴세 조선소는 그렇게 문을 닫았다.
오덴세 조선소의 모습 ⓒ https://museumodense.dk
오덴세 시의 여러 모습 ⓒ https://investinodense.dk/why-city-of-odense
그 좋았던 영광은 더 이상 없네
오덴세 조선소는 덴마크의 자부심이자 세계를 호령하던 유럽 최대의 조선소로 성가를 날렸다. 머스크가 세계 최대의 해운회사로 성장한 것도 자체적으로 선박 건조가 가능한 오덴세 조선소를 산하에 거느리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이곳에서 머스크 라인은 창업 초기에 증기선을 지어 화물을 실어 날랐고, 1960년대 들어서는 발 빠르게 컨테이너 선박을 건조해 정기선 컨테이너 서비스에 나섰다. 70년대 석유 붐이 불 때는 유조선을 만들어 팔았고, 덴마크 정부에서 발주하는 군함도 다량으로 납품했다. 그러던 조선소가 세계 경기 침체에 휘청거리다가 일본, 한국, 중국에 치여 조선 종주국 자리를 내줬다. 조선소 폐쇄는 근로자 실직과 소비 심리 위축을 가져왔다. 시장에 돈이 풀리지 않으니, 삶이 팍팍해졌고, 도시는 생기를 잃어갔다.
오덴세 조선소에서 건조한 당시 세계 최대 컨테이너 선박(엠마 머스크 호) ⓒhttps://museumodense.dk
오덴세 로보틱스가 출범한 이유
망가진 산업 생태계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정부와 대학, 기업들이 힘을 합쳤다. 오덴세 시 정부는 각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곳의 새로운 미래 먹거리로 로봇 산업을 집중적으로 키운다는 전략을 세웠다. 오덴세 조선소가 선박 용접과 도장작업에 로봇을 사용하는 선두 주자이었던 점을 감안한 조치였다. 먼저 첨단 로봇 기술 개발과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오덴세에 있는 덴마크 남부 대학에 130억 원이 넘은 예산을 지원했다. 로봇 산업 클러스터를 구축하고, 기술 개발과 창업을 지원하기 위해 오덴세 로보틱스(Odence Robotics)도 설립했다. 덴마크 로봇 산업과 공장 자동화, 드론 기술 등을 개발하고, 창업을 지원하는 클러스터다. 오덴세 로보틱스의 미션을 보면, 이 같은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기업과 사람, 인류에 도움이 되는 로봇, 자동화, 그리고 드론 솔루션을 만드는 회사의 성장과 혁신을 지원하는 걸 설립 목적으로 내걸고 있어서다. 로봇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퓌넨 섬에 있는 오덴세를 비롯하여 덴마크 전역 5곳에 로봇 허브를 두고 있으며, 340개가 넘는 기업 등이 이곳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다.
오덴세 로보틱스 클러스트 현황 ⓒhttps://www.odenserobotics.dk
글로벌 로봇 강국으로 거듭나다.
요즘 덴마크는 세계에서 알아주는 로봇 강국으로 평가받고 있다. 산업의 자동화가 급속도로 이뤄지면서 로봇, 자동화, 드론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어서다. 2023년 이 부문의 매출액이 지난해보다 20% 넘게 성장해 48억 유로에 이를 전망이다. 덴마크 로봇 산업과 오덴세 로보틱스가 빠른 속도로 성장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기본적으로 이 부문에 대한 글로벌 수요가 많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제조업뿐만 아니라 물류 및 운송 분야, 에너지 개발, 군수와 안보, 헬스 및 식품 가공 분야 등에서 수요가 지속해서 커지고 있다. 둘째, 기업 간 협력 시스템이 강력하게 구축되어 있다. 덴마크의 540개 로봇 관련 기업 가운데 80% 이상이 다른 기업과 서로 협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로 기술 개발과 교육 등 지식 공유 부문에서 이 같은 경향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완벽한 로보틱스 창업 생태계
셋째, 기업 수요가 늘어나는 첨단 로봇 기술과 산업 자동화 솔루션 부문을 선도하고 있는 것도 성공 요인의 하나다. 협동 로봇 분야의 글로벌 강자인 유니버설 로봇이 이곳에서 탄생한 배경이다. 넷째, 로봇 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스타트업 창업 생태계가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다. 오덴세 로보틱스 스타트업 펀드를 통해 다양한 창업 및 스케일 업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 놓고 있다. 해외자본이 유입되고, 외국계 스타트업이 둥지를 트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로벌 로봇 산업은 2020년에 250억 달러에서 2030년에 1,6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연평균 20% 넘게 고성장하는 산업이다. 인구 고령화, 로봇 가격의 하락, 각 분야에서의 수요 증가 등이 로봇 산업의 성장을 이끄는 원동력이다. 덴마크는 문 닫은 조선소를 활용하기 위해 로봇 클러스터를 만들었다. 그리고 산업 전환에 성공했다. 불과 몇 년 만에 오덴세 로보틱스는 정부, 기업, 대학 등이 참여하는 강력한 협력 체제를 만들어 세계 최고의 로봇 공학 및 드론 산업 생태계를 열었다. 그 중심에 있는 유니버설 로봇은 우리나라 현대삼호중공업에 용접 자동화에 쓰이는 협동 로봇(Co-Bot) 24대를 공급했다. 오덴세 로보틱스가 마침내 진격을 시작했다.
다양한 형태의 유니버설 로봇 ⓒhttps://www.universal-robots.com
최재선
(주)에코트라 오션 랩
연구개발본부장, 법학박사
해양 전문지 『디 오션』, 『오션 테크』, 『환동해 경제학』 등을 공동기획하고, 같이 만들었다.